《데스티노 칸타레》 8화. 사랑의 향기는 지워지지 않는다 (1)
새벽 푸른빛이 감도는 골목길은 이지수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방금 전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그림자처럼 초라했던 남자의 존재는 이미 희미한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그녀의 의식 밖으로 밀려났다. 머릿속은 온통 다음 레이드 구상으로 가득했다. ‘네임드 몬스터, 칠흑의 칼날 아스모단의 3페이즈 패턴. 광역 침묵 스킬 시전 직전에 탱커에게 생존기를 몰아주고, 딜러들은 2초 안에 산개해야 한다. 문제는 산개 위치인데….’
그녀의 발걸음이 낡은 5층 빌라 앞에서 멈췄다. ‘에덴빌’.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외벽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얼룩처럼 번져 있었다. 3층, 자신의 방 창문에서는 아직 불빛이 새어 나왔다. 24시간 돌아가는 컴퓨터 모니터 불빛일 터였다.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익숙하게 움직였다. 삐리릭, 건조한 전자음과 함께 굳게 닫혔던 철문이 열렸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그녀의 사고는 현실과 가상 세계를 넘나들었다. 현실의 계단은 삐걱거렸고, 가상의 탑은 웅장했다. 현실의 공기는 눅눅한 먼지 냄새를 품고 있었고, 가상의 전장에는 피와 마법의 비린내가 진동했다. 현실의 이지수는 K대 중퇴 후 아르바이트와 게임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스무 살 여자였지만, ‘에텔가드 연대기’ 속 ‘지슈카’는 서버 최초로 드래곤을 솔로잉한 전설적인 공격대장이었다. 그 간극이 그녀를 살아있게 했다.
302호 현관문 앞에 서서 열쇠를 꺼내 돌렸다. 끼익, 녹슨 경첩이 우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안에서는 컵라면 국물과 방향제가 뒤섞인 묘한 냄새가 그녀를 맞았다.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은 방문 틈새로 새어 나오는 모니터 불빛뿐이었다. 그녀는 신발을 대충 벗어 던지고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가 사라진 골목 어귀, 어둠 속에서 한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김명령이었다.
이지수. 그녀의 뒷모습. 단 몇 초의 스침이었지만, 25년의 세월을 함께한 아내의 뒷모습을 그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5년이었다. 이 낯선 평행세계의 2001년에 떨어진 후, 10억이 넘던 돈을 모두 탕진하며 미친 듯이 그녀를 찾아 헤맨 세월. 허공에 삽질하듯,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것처럼 막막했던 5년의 시간이 방금 전 그 찰나의 순간으로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얼어붙었던 혈관으로 뜨거운 피가 다시 흐르는 감각. 죽었던 세포 하나하나가 되살아나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굶주림도, 추위도, 온몸을 짓누르던 절망의 무게도 모두 잊었다.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그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
‘찾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가 골목으로 사라진 뒤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서 숨을 죽였다. 행여나 자신이 섣불리 다가갔다가 그녀가 놀라 도망이라도 치면, 이 기적 같은 기회를 다시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그는 짐승처럼 신중해졌다. 어둠을 방패 삼아, 소리 없이 그녀가 들어간 빌라를 향해 다가갔다.
‘에덴빌’. 낡고 허름한 건물 이름표를 확인한 그의 눈에 잠시 의문이 스쳤다. 그가 기억하는 20대 이지수는 부모님과 함께 단독주택에 살았다. 모든 것이 미세하게 뒤틀린 이 세계의 법칙을 그는 이미 5년간의 실패를 통해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사람이 같으면, 이지수라는 존재가 이곳에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었다.
그는 빌라 맞은편 전봇대 뒤에 몸을 웅크렸다. 3층의 한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방이 틀림없었다. 새벽 냉기가 얇은 옷을 뚫고 살을 에는 듯했지만, 그는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그 작은 창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 안에, 그의 세상 전부가 있었다.
* * *
“대장님, 오셨습니까!”
“지슈카 님, 어서 오세요! 편의점은 무사히 다녀오셨는지요?”
이지수가 ‘에텔가드 연대기’에 접속하자마자 길드 채팅창이 순식간에 활기를 띠었다. 그녀는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듯 타자를 쳤다.
[지슈카]: 다들 대기하고 있었나. 브리핑 시작한다. 10분 뒤, ‘칠흑의 칼날 아스모단’ 공략 재개. 포지션은 아까와 동일. 힐러들은 3페이즈 광역 침묵 대비해서 마나 관리 철저히 하고, 탱커는 생존기 아끼지 마. 특히 ‘절망의 포효’ 때 어그로 튀지 않게 조심하고.
그녀의 손끝에서 나가는 문장들은 짧고 단호했지만, 그 안에는 절대적인 신뢰와 카리스마가 담겨 있었다. 길드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약을 보충하고, 장비를 점검하고, 버프를 돌렸다. 현실의 그녀가 라면 국물로 끼니를 때우는 것과 달리, 게임 속 그녀의 부대원들은 최고급 비약과 음식으로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지수야! 너 또 밤새우니?”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이지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현실로 강제 소환되는 불쾌한 느낌.
“나갔다 왔으면 씻고 좀 자! 내일 오후에 박 여사님 아들 선본다며. 시간 맞춰 나가려면 일찍 일어나야지!”
“아, 안 나가!”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며 헤드셋 볼륨을 높였다. 선. 지긋지긋한 단어였다. 대학을 그만둔 이후, 어머니는 어떻게든 그녀를 ‘정상적인’ 궤도로 되돌려 놓으려 애썼다. 그 방식이 항상 이런 식이었다.
[지슈카]: 전원, 던전 입구로 집결. 5분 뒤 출발한다. 늦는 사람 벌금 10골드.
그녀는 다시 게임에 몰입했다. 모니터 속 화려한 갑옷을 입은 여기사, ‘지슈카’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현실의 초라한 자신을 완벽하게 가려주는 가장 안전한 갑옷이었다. 레이드가 시작되고, 그녀의 지휘 아래 40명의 공격대원들은 거대한 루시퍼 ‘아스모단’을 향해 돌격했다. 검과 마법이 부딪치는 소리, 비명과 함성이 헤드셋을 통해 고막을 때렸다. 이지수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밤새 웅크리고 있던 김명령의 몸은 감각이 없을 정도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단 한 순간도 3층 창문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창문의 불빛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그녀도 자신처럼, 뜬눈으로 밤을 보낸 걸까. 혹시 그녀 역시 자신을 찾고 있었던 건 아닐까. 헛된 희망이 절망으로 얼어붙은 가슴에 작은 불씨를 지폈다.
사람들이 하나둘 집을 나서기 시작했다. 출근하는 직장인, 신문을 돌리는 소년, 등교하는 학생. 그들의 무심한 시선이 전봇대 뒤에 거지꼴로 숨어 있는 그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사라졌다. 김명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세계에는 오직 저 창문 안의 그녀만이 존재했다.
오전 8시가 넘었을 무렵, 빌라 공동 현관문이 열리고 한 중년 여성이 장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그는 직감했다. 이지수의 어머니였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지만, 그가 기억하는 장모님의 얼굴이 분명했다. 심장이 다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이지수는 저 안에 있다.
그는 결심했다. 더 이상 이렇게 숨어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는 전봇대 뒤에서 나와, 마치 아무렇지 않은 행인처럼 빌라 입구로 다가갔다. 운 좋게도, 한 주민이 출근을 위해 나오면서 현관문이 잠시 열렸다. 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3층. 302호.
녹슨 철문 앞에 선 그는 심호흡을 했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5년간 수없이 되뇌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나야, 명령이야.’, ‘우리 딸, 나영이…’, ‘보고 싶었어, 지수야.’
어떤 말도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초라한 자신의 행색을 내려다보았다. 며칠을 감지 않아 떡 진 머리, 악취가 나는 낡은 옷, 굶주림에 움푹 팬 뺨. 이 모습으로 그녀 앞에 나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5년의 기다림은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똑. 똑.
심장이 멎는 듯한 정적이 흘렀다.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그가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려던 순간, 문 안쪽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그 목소리. 꿈에서도 그리던 이지수의 목소리였다. 김명령은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누르며 입을 열었다.
“저… 이지수 씨, 계신가요?”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나왔다. 안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철컥, 하고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빼꼼히 열렸다. 굳게 잠긴 안전고리 너머로, 부스스한 머리를 한 이지수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의 눈이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에는 낯섦과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누구신데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김명령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20대의 앳된 얼굴. 하지만 그가 기억하는 스무 살의 그녀와는 어딘가 달랐다. 생기 넘치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세상에 대한 무관심과 피로가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지수였다. 그의 아내였다.
“지수야… 나야.”
그가 겨우 쥐어짜낸 한마디. 그러나 그녀의 눈썹이 꿈틀했을 뿐,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네? 누구시냐고요. 사람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요.”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니야. 나… 김명령이야. 기억 안 나?”
그의 말에, 그녀는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김명령이요? 모르는 이름인데요. 장난치지 마시고 가세요. 경찰 부르기 전에.”
경찰. 그 단어가 비수처럼 김명령의 심장에 박혔다. 눈앞의 여자는 정말로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기억상실 같은 게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완벽한 타인의 눈빛이었다. 그가 5년간 붙들고 있던 마지막 희망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우리… 결혼했잖아. 우리 딸, 나영이도… 나영이, 기억나지? 우리 예쁜 딸…”
그가 절박하게 매달리자, 이지수의 얼굴에 경계를 넘어선 공포가 어렸다. 이 남자는 미쳤다. 그녀는 그렇게 판단했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당장 안 꺼져?”
그녀는 문을 닫으려 했다. 그 순간, 김명령은 이성을 잃고 문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잠깐,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제발!”
“악! 뭐야!”
그의 거친 행동에 놀란 이지수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문을 밀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김명령의 손가락이 문틈에 끼었다.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는 아픔조차 느낄 수 없었다.
철컥. 철컥.
안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그리고 다시 완벽한 정적.
김명령은 문에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았다. 으스러진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 차가운 복도 바닥을 적셨다. 하지만 육체의 고통보다 더한 것이 심장을 갈가리 찢고 있었다.
그는 깨달았다. 이 여자는 그가 알던 이지수가 아니다.
그가 사랑했던, 그와 25년을 함께했던, 그들의 딸 나영이를 낳아주었던 그의 아내가 아니었다. 이곳은 그가 살던 세상의 과거가 아니라, 모든 것이 다른 평행세계. 루시퍼가 했던 말이, 5년간 부정하고 싶었던 진실이, 이제야 거대한 바위처럼 그의 온몸을 짓눌렀다. 희망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그는 망가진 인형처럼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피 흘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쥔 채, 그는 계단을 내려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영혼이 부서져나가는 것 같았다.
빌라 밖으로 나오자,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했다. 하지만 김명령의 세상은 방금 전, 저 낡은 빌라 3층 복도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5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를 찾기 위해 쏟아부었던 시간과 돈, 그리고 감정들.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의미한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아내도, 딸도, 그리고 이제는 삶의 목적마저도.
그는 정처 없이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텅 빈 껍데기만 남은 채 도시를 헤맸다. 그러다 문득, 그의 귓가에 루시퍼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맴돌았다.
‘당신의 딸을 죽이고, 당신의 아내를 빼앗고, 당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진짜 범인… 그 인형사를 찾아야죠.’
인형사.
사랑을 되찾으려던 길이 막히자, 증오의 길이 열렸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없다면, 빼앗아간 자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야 했다. 김명령의 텅 빈 눈동자에, 희미하지만 검고 질긴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복수심이라는 이름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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