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사부의 검, 붉은 낙인
죽음이란 이토록 고요한 것이었던가.
진소운은 눈을 뜬 채 쓰러져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백호산의 하늘은 이상하리만치 맑았다. 초겨울의 청명한 공기가 폐 속을 파고들어야 했건만,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기포가 터지는 것처럼 가슴 안쪽이 무너졌다. 가슴 한가운데에 박힌 검. 그 검의 주인을 그는 느리게, 아주 느리게 올려다보았다.
사부였다.
한천악(韓天嶽)이 거기 서 있었다. 눈송이가 내리는 백호산 정상, 삼백 구의 시신 위에, 흰 도복 자락을 조용히 나부끼며. 자상한 얼굴이었다.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는, 제자의 수련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 얼굴이었다. 다만 그 눈동자 깊은 곳에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언가가 고여 있었다. 안도였다. 오랜 기다림이 마침내 끝난 자의 나른한 안도.
"수고했다, 소운아."
목소리마저 따뜻했다. 그것이 가장 끔찍했다.
진소운의 입술이 열렸다. 피가 새어 나왔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손을 들려 했으나,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진기가 역류하는 느낌과 함께 전신이 굳어들었다. 사부의 검이 단순한 관통이 아님을 그제야 깨달았다. 검 끝에 실린 현경(玄境)의 기운이 서서히 그의 단전을 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비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13살부터 한 올 한 올 쌓아 올린 내공이, 마치 수십 년 묵은 실타래가 풀리듯 해체되어 사부의 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천마검(天魔劍)이었다.
사부가 26년을 기다린 것이 이것이었다. 그는 진소운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진소운을 키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검의 그릇을 만들어 온 것이었다. 백호문을 살려둔 것도, 진소운에게 백호검법의 7성을 전수한 것도, 모두 단전의 밀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삼백 명의 목숨은 그 과정에서 쌓인 비료에 불과했다.
하늘이 기울었다. 아니, 그의 시야가 기울고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을 맞고 웃던 어머니. 부친이 떠올랐다. 제 이름을 부르며 검을 내밀던 진광호(陳光虎)의 커다란 손. 대사형 마진(馬鎭)이 생각났다.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 동문들의 목소리가 바람 사이로 들렸다. 유연(柳燕)이 기억났다. 그녀의 죽음을 막지 못했던 날의 비가 가슴 위에 다시 쏟아지는 것 같았다.
*사부.*
*당신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의식의 마지막 심지에 불꽃이 하나 붙었다. 분노도 아니었다. 슬픔도 아니었다. 그것은 한(恨)이었다. 이름 붙이기조차 어려운, 뼈에 새겨지는 종류의 한. 26년 치의 믿음과 배신이 한꺼번에 타오르는 냄새가 났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진소운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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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웠다.
그것이 첫 번째 감각이었다. 흙냄새와 풀 냄새가 섞인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눈꺼풀 안쪽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햇살이었다. 아직 겨울이 오지 않은 계절의 투명한 햇살이 눈꺼풀을 두드렸다.
진소운은 눈을 떴다.
나무였다. 오래된 홰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빛이 흔들렸다. 몸을 일으키려 손을 짚었다. 손이 떨렸다. 발목이 떨렸다. 전신이 가늘게 진동하고 있었다. 가슴 한가운데를 더듬었다. 상처가 없었다. 도복 위로 검흔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 맺혀 있는 것은 삼백 구의 시신이었다.
기억이 쏟아졌다. 댐이 터지듯, 수문이 모조리 열리듯, 전생 26년의 기억이 물살이 되어 머릿속을 휩쓸었다. 처음 검을 쥐던 날. 사부의 무릎에 기대어 잠들던 유년의 겨울밤들. 동문들과 나눠 먹던 밥상. 유연의 웃음소리. 부친이 마지막으로 남긴 눈빛. 마진 사형이 어깨를 두드리며 소리치던 목소리. 그리고 사부의 검. 흰 도복. 따뜻한 미소. 그 미소 뒤에 숨겨진 26년의 기만.
진소운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이를 깨물지도 않았다. 다만 두 손이 먼저 반응했다.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어 붉은 자국이 생겼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떨렸다. 그는 그 떨림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라보았다. 삼백이었다. 삼백 명의 목숨이 한 사람의 손안에서 일순간 사라졌다. 어머니가 그 안에 있었다. 부친이 그 안에 있었다. 유연도.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번. 두 번.
단전 안을 살폈다. 회귀 전 화경(化境) 직전까지 쌓아 올렸던 내공은 흔적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아니, 텅 비어 있다고 표현하기도 과분할 만큼, 갓 무공에 입문한 어린아이의 단전이었다. 13살의 단전. 회귀 전 그 날 아침, 사부의 손에 무공을 온전히 빼앗기기 전의 상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손이 떨리는 것이 멈추지 않았다.
그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고 가는 손이었다. 13살의 손. 이 손으로 다시 검을 쥐어야 했다. 이 손으로 다시 내공을 쌓아야 했다. 이 손으로 한천악을 마주해야 했다. 지금 당장 달려가 목을 조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에게는 14년이 필요했다. 사부의 진짜 얼굴을 강호 전체 앞에 드러내고, 정파의 이름 아래 공개적으로 처단하기 위해 필요한 14년이.
진소운은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눈동자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검었다. 깊었다. 26년의 기억이 담긴 사람의 눈이었다.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소운아! 소운아, 거기 있었구나!"
마진 사형이었다. 삼십 화에서 죽을 운명의 그 우직한 얼굴이 나무 사이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죽지 않은 마진 사형이. 숨이 막혔다. 눈이 뜨겁게 달아올랐으나 눈물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진소운은 천천히 일어섰다. 무릎이 흔들렸다. 그래도 섰다.
"여기 있습니다, 사형."
목소리는 놀랍도록 고요했다.
마진이 달려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장난스럽게 이마를 짚으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왜 이래? 얼굴이 무슨 귀신 본 것처럼 됐잖아."
진소운은 입을 열었다. 미소였다. 정확하게 미소였다. 그러나 마진이 보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의 두 손이, 도복 안에서, 멈추지 않고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바람이 차서요."
짧은 대답이었다. 그는 돌아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 백호문의 지붕이 보였다. 아직 서 있는 지붕. 아직 연기가 오르는 굴뚝. 아직 살아 있는 삼백 명의 목숨.
그리고 저 안 어딘가에, 자상한 얼굴로 제자를 기다리고 있을 한천악이 있었다.
*14년.*
진소운은 눈을 내리깔았다. 손을 쥐었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번 한 번만큼은, 그 떨림을 자신의 심지로 삼기로 했다. 꺼지지 않도록 붙잡아 둘 불씨로.
사부여,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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