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티노 칸타레》 1화. 해님과 바람
탄 냄새가 먼저였다.
눈을 뜨기 전에, 빛이 들어오기 전에, 탄 냄새가 먼저 목구멍 깊숙이 밀려들었다. 나무가 타는 냄새가 아니었다. 금속이 녹아내린 냄새, 기름이 끓어오른 냄새,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재가 된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 어떤 냄새. 숨을 들이쉬려 할 때마다 폐 안쪽이 긁혀나가는 것 같았다.
남자는 눈을 떴다.
시커먼 천장이 보였다. 아니, 천장이 아니었다. 뼈대만 남은 철골 구조물이 하늘을 향해 비틀린 채 서 있었고, 그 사이로 회색 하늘이 들여다보였다. 바닥은 콘크리트였다. 콘크리트 위에 재가 켜켜이 쌓여 있었고, 그 위에 남자가 누워 있었다. 뺨이 닿아 있는 곳이 여전히 미열을 품고 있어서, 불이 꺼진 지 오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여기가 어디인지, 심지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손에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흩어져 있었다. 뭔가가 있었다는 것만 알았다.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입술 끝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철골 너머로 바람이 지나갔다. 그 소리에 남자는 겨우 팔꿈치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손바닥에 재가 묻었다. 옷은 어디서부터 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군데군데 검게 그을려 있었고, 왼쪽 소매는 아예 절반 가까이 사라진 상태였다. 머리카락을 손으로 짚어보니 거칠고 뻣뻣했다. 불 속에 있다 나온 사람의 머리카락이었다.
그런데 피가 없었다.
남자는 천천히 자신의 팔뚝을 살폈다. 겉옷 안쪽까지 들어가 살갗을 확인했다. 찰과상 하나 없었다. 화상 자국도 없었다. 이 처참한 잔해 속에서 살아났는데, 몸 어디에도 상처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기묘하게 느껴졌다.
"저기, 아직 사람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방화복을 입은 소방관이 잔해 더미 너머에서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동료들이 달려오는 소리, 무전기가 지직거리는 소리, 발소리들이 한꺼번에 가까워졌다. 남자는 그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일어설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듯이.
그렇게 구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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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침대는 딱딱했다.
남자는 천장을 보았다. 흰 천장이었다. 형광등이 켜져 있었고, 커튼 너머로 낮의 빛이 새어들어왔다. 어딘가에서 링거 주입기가 일정한 속도로 적하하는 소리가 났다. 소독약 냄새가 탄 냄새를 대신하고 있었다.
남자는 잠시 그 냄새를 맡았다.
소독약 냄새가 다른 기억을 당겨올 것 같았다. 무슨 기억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가슴 안쪽 어딘가가 조여드는 느낌이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감각. 뭔가를, 누군가를, 잃었다는 감각.
그 순간 꿈이 떠올랐다.
꿈인지 기억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여자의 무릎이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릎 위에 머리를 얹고 있었고, 여자가 뭔가를 말하고 있었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입술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눈을 마주쳤을 때 여자도 눈을 크게 뜨며 더 크게 입을 벌렸지만, 그래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없는 세계에서 여자만 혼자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여보, 라고 불렀던 것 같다. 꿈에서.
남자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병실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들어왔다. 젊은 여자였다. 체온계와 혈압계를 들고 능숙하게 움직이면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일어나셨어요? 아까부터 뒤척이시던데."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간호사가 손목을 잡고 혈압을 재기 시작했다. 차가운 손이었다.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이리 소리치시더니."
"소리를 질렀나요?"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연기가 폐 안에 남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런 목소리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네. 누군가를 부르셨어요. 젊으신 분이 꿈에서 고생이 많으셨나봐요."
간호사가 메모를 적으며 말했다. 남자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천천히 돌려 침대 옆 벽면을 바라보았다.
거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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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남이라고 생각했다.
벽에 붙은 작은 사각 거울. 거기에 담겨 있는 얼굴을 보고, 남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병실에 다른 환자가 있나 싶었다. 그런데 거울은 침대 쪽을 향해 있었고, 침대에 누운 것은 자신뿐이었다.
그 얼굴이 자신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이십 대였다. 어떻게 보아도 이십 대 초반의 얼굴이었다. 피부가 팽팽하고, 눈 밑에 주름이 없고, 턱선이 뚜렷하고, 머리카락이 까맣고. 거울 속 얼굴은 분명히 젊었다.
남자는 오른손으로 자기 뺨을 만져보았다. 거울 속의 얼굴도 오른손을 들어 뺨을 만졌다.
"…내 얼굴이 아닌데."
중얼거렸다. 간호사가 뭔가를 물어보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남자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그건 이런 얼굴이 아니었다. 흰머리가 섞이기 시작했고, 눈 옆에 잔주름이 생겼고, 아침마다 피곤함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나영이가 아빠 머리 흰머리 있어, 라고 말하면서 손으로 헤집었던 것이 생각났다.
나영.
그 이름이 떠오른 순간, 무언가가 터졌다.
"저기, 죄송한데요."
남자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지금 몇 년도예요?"
간호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지금 몇 년도냐고요."
"2001년인데요."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간호사가 뭔가를 더 말했지만 귓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2001년이라는 두 음절이 머릿속에서 계속 울렸다. 2001년. 2001년. 그리고 거울 속 이십 대의 얼굴.
2020년에서 2001년으로.
그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십구 년이라는 시간이 통째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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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오십 대처럼 보이는 중년 남자였고, 한 명은 서른이 되었을까 싶은 젊은 남자였다. 둘 다 형광등 빛 아래서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이 든 쪽이 먼저 말을 꺼냈다.
"신분 조회 해봤어요. 김명령 씨, K대 재학생이죠? 전과도 없고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폐공장에 왜 있었던 겁니까?"
"기억이 안 납니다."
"기억이 안 나?"
젊은 쪽이 끼어들었다. 말투가 조금 거칠었다.
"불이 그렇게 났는데 몸에 화상 자국 하나 없잖아요. 그게 납득이 돼요? 우리한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젊은 경찰이 한 발 가까이 왔다.
"기억 안 난다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방화 가능성도 있고, 당신이 거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설명이 돼야 우리도 뭘 해줄 수 있죠. 지금 용의자 선상에 올라와 있는 거 알아요?"
용의자.
남자는 그 단어를 한 번 씹었다가, 천천히 경찰을 바라보았다.
"증거가 있습니까?"
"네?"
"저를 용의자로 보시려면 증거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기억이 없는 게 증거가 됩니까?"
젊은 경찰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기억이 없다고 하시는 분이 본인 권리를 꽤 잘 아시네요."
"그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도 기억이 없어서 답답하고, 그 점에서는 협조할 의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근거 없이 용의자 취급을 받을 이유는 없어요. 기억이 없는 것이 범죄는 아니니까요."
나이 든 경찰이 젊은 쪽의 팔을 잡아당기며 한 발 물러서게 했다. 그러더니 작은 수첩을 꺼내 뭔가를 적는 척했다.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기억 회복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요. 아무튼, 경과를 계속 지켜봐야 할 테니 연락처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젊은 경찰이 병실을 나가면서 의자를 발로 툭 건드리고 나갔다. 무의식적인 행동인지 의도적인 행동인지 알 수 없었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진 뒤, 병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남자는 링거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규칙적인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이 방금 한 말들을 되새겼다. 스무 살의 몸속에 사십 대의 머리가 들어 있다는 것. 그 기묘하고 불합리한 상황이, 경찰 앞에서 말을 고르는 방식으로 드러났다.
이십 대라면 저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이십 대의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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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품 봉투에는 지갑과 휴대전화가 들어 있었다.
경찰이 가져온 것이었다. 현장에서 수거된 것이라고 했다. 봉투를 열고 지갑부터 확인했다. 만 원짜리 지폐 네 장. 동전 몇 개. 신용카드 한 장, 체크카드 한 장. 그리고 플라스틱 키 카드 한 장.
키 카드를 뒤집었다.
스카이 팰리스.
작은 글씨로 새겨진 건물 이름이었다. 아파트 이름이었다. 기억 어딘가에서 그 이름이 걸렸다. 2001년이면 아직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시기였던 것 같은데, 아니면 막 완공된 시기였나. 강남 어딘가에 지어졌다는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 분양가가 어마어마하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있었다.
남자는 체크카드를 오래 바라보았다.
잔액이 얼마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스무 살의 자신이라면 — 아니, 스무 살의 김명령이라면 — 통장에 넉넉한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부모님이 부자가 아니었다. 평범한 가정이었다. 학교 다니는 내내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고, 기숙사비가 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그 시절이었다.
그런데 스카이 팰리스의 키 카드가 지갑에 있었다.
남자는 퇴원 수속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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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로비 한쪽에 CD기가 있었다.
체크카드를 삽입하고 잔액 조회를 눌렀다. 화면이 잠깐 깜빡이더니 숫자가 떴다.
남자는 숫자를 읽었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그 다음에도 숫자가 있었다.
십억이 넘었다.
CD기 화면 앞에서 남자는 꽤 오랫동안 서 있었다. 뒤에 사람이 기다리는지 아닌지도 보이지 않았다. 숫자를 다시 세었다. 틀리지 않았다. 분명히 십억이 넘는 돈이 통장에 들어 있었다.
스무 살의 자신은 이런 돈이 없었다.
이 세계의 스무 살 김명령에게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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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는 거절했다.
경비가 명단에 없다고 했다. 단호하고 퉁명스러웠다. 더 말하면 경비를 부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남자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이미 지갑 속의 키 카드가 어딘지를 알고 있었다.
스카이 팰리스는 예상보다 가까웠다.
건물 앞에 섰을 때,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 건물의 입주자가 자신이라고? 그 생각이 실감으로 바뀐 것은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키 카드로 층수를 눌렀을 때, 엘리베이터가 막힘없이 올라가면서였다.
문이 열렸다.
복도 끝에 문이 하나 있었다. 키 카드를 대자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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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웠다.
커튼이 다 쳐져 있어서였다. 조심스럽게 들어가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다. 불을 켰다.
넓었다. 엄청나게 넓었다. 백 평 남짓 되어 보이는 공간에 고급 가구들이 들어차 있었고, 창가 쪽은 통유리였다. 커튼 사이로 빛이 새어들어오는 것을 보니 꽤 높은 층이었다. 바닥은 원목이었고, 주방은 붙박이 가구로 정돈되어 있었다.
다만 옷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소파 위에, 바닥에, 의자 등받이에. 스무 살의 주인이 이 집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말해주는 흔적들이었다.
남자는 소파에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도시가 보였다. 2001년의 도시. 스카이라인이 조금 낯설었다. 아직 올라가지 않은 건물들이 있었고, 이미 사라졌어야 할 건물들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2020년에 보던 하늘이 아니었다.
남자는 한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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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번호 목록을 내렸다. 위쪽에 저장된 번호들부터 훑었다. 이름들이 보였다. 친구들, 교수님, 선배. 그러다가 한 이름에서 멈췄다.
엄마.
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에 머물렀다.
전화를 걸기 전에, 남자는 자신이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지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정리가 되지 않았다. 너무 이상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상황 정리를 잘 한들, 엄마에게 어떻게 물어보는 것이 자연스러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물어보기로 했다.
"어, 아들?"
전화를 받은 목소리가 따뜻했다. 오래 들어온 목소리였다. 2020년에도 있었고, 2001년에도 있는 목소리.
"엄마, 나예요."
"응 알지.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전화해봤어요."
잠깐 침묵이 있었다가, 엄마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밥은 먹었어? 거기 아파트 냉장고에 내가 넣어둔 거 있어. 꺼내먹어."
남자는 그 말에 잠시 멈췄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 혹시 로또 당첨됐어요? 해서."
짧은 침묵.
"아이고, 오늘따라 이상하네. 그건 비밀로 하기로 했잖니. 어디서 말하고 다니면 못쓴다."
"얼마나 됐어요?"
"또 왜 그래, 아들. 엄마 아빠 나 각각 한 장씩 샀잖아. 한 장에 육십억씩이잖아. 돈이 이상하게 많으면 이상한 사람들이 달라붙는다고 했잖니. 조용히 살기로 했잖아."
육십억.
부모님 각각 육십억. 그리고 자신의 통장에 십억 이상.
남자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가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알겠어요. 몸 조심하세요."
"어, 너도 밥 잘 챙겨 먹고.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전화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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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남자는 컴퓨터를 켰다.
스무 살 김명령이 쓰던 컴퓨터였다. 바탕화면이 어질러져 있었다. 게임 아이콘, 강의 자료, 대충 저장된 문서들. 그 어질러진 바탕화면 위로 검색창을 열었다.
기억을 더듬어 이름들을 입력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사건들. 백화점 붕괴. 다섯 명의 아이들이 실종된 사건. 자신이 2001년이라는 시점에 일어났다고 알고 있던 일들.
검색 결과가 없었다.
다른 이름을 입력했다. 다른 사건을 입력했다. 연도를 바꿔가며 검색했다.
역시 없었다.
남자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바라봤다.
이것은 과거가 아니었다. 2001년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살았던 2001년이 아니었다. 어딘가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른 세계. 역사가 미묘하게 다르고, 사건이 다르게 흘러간 세계.
그러니까 이지수를 아무리 찾아도 없었을 것이다. 아내가 다니던 학교, 아내가 있었던 장소, 아내를 알던 사람들. 그것들이 이 세계에서는 다르게 배치되어 있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자신이 알던 이지수가 이 세계에 없을 수도 있었다.
남자는 그 생각이 가슴에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돌을 삼킨 것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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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이 지나갔다.
그 시간을 한 줄로 요약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긴 설명이 필요 없기도 했다. 남자는 처음에는 시도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를 이용해서 돈을 불리려 했다. 이 세계가 자신이 알던 세계와 달랐지만, 그래도 큰 흐름은 비슷할 것이라고 믿었다.
'두글'이라는 작은 회사가 있었다. 몇 년 뒤에는 엄청나게 커질 거라고 알고 있었다. 통장에 있던 돈을 전부 주식에 넣었다. 그런데 두글은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이 세계에서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반토막이 났다. 남은 돈을 부동산으로 돌렸다. 강남에 건물을 샀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는 강남보다 강북이었다. 교통망이 다르게 뚫렸고, 사람들이 다른 방향으로 몰렸다.
무엇 하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꼭 누군가가 그의 발 앞에 계속 돌멩이를 놓는 것 같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방향으로 발을 내딛으면 그 직전에 길이 바뀌어 있었다.
5년이 지났을 때, 남은 돈은 없었다.
이지수를 찾지 못했다.
복수의 대상을 찾지 못했다. 그 엄청난 덩치의 뒷모습을 기억하는데, 이름도 모르고 어디서 나타난 자인지도 몰랐다. 흥신소를 전전했다. 아내를 알 것 같은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학교 동창들을 수소문했다. 이지수라는 이름 자체는 존재했지만, 그 이지수가 자신이 알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2006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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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마차는 한강 근처였다.
남자는 소주잔을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이미 세 병째였다. 포장마차 주인 아주머니가 옆 테이블을 치우면서 남자를 눈으로 살폈다. 봐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소주를 한 잔 더 따랐다. 손이 조금 떨렸다.
오늘은 나영이 생일이었다.
이 세계에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생일. 아버지 혼자 기억하는 생일. 어쩌면 이 세계에 없는 아이의 생일.
남자는 소주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마시지 않았다. 그냥 들었다가 내려놓는 것을 두 번 반복했다.
딸아이가 처음 걸음마를 뗐을 때 뒤뚱거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의 손가락을 꼭 붙잡았던 작은 손. 아빠, 라고 부르기 전에 앞니가 두 개 빠져서 발음이 새어나오던 목소리. 그게 생각났다. 그리고 마지막 기억.
무력하게 서 있는 자신의 눈앞에서.
기억이 밀려왔다. 한꺼번에, 통제 없이.
거대한 덩치였다. 뒷모습이 먼저 보였다. 천장에 닿을 것 같은 어깨. 그 어깨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고, 그다음에 소리가 들렸고, 그다음에 자신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왜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지가 지금도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딸이 눈앞에 있는데 아버지가 그냥 서 있었다.
나영이, 라고 불렀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공간에서.
"나영아."
포장마차 안에서 소리가 새어나왔다. 남자는 소주잔을 쥔 채 고개를 숙였다. 목이 막혔다. 소주의 알싸한 냄새가 올라왔다. 뺨을 타고 뭔가 흘러내렸다. 뜨거웠다.
5년이었다. 5년 동안 이 세계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아내도 없고, 딸도 없고, 복수할 대상도 없고, 돈도 없어졌다. 그 5년 동안 자신이 한 것은 찾는 시늉이었다. 방향도 모르고 지도도 없이 낯선 도시를 헤매는 것이었다.
울음이 나왔다.
25세의 몸이 울었다. 40대의 기억을 가진 25세가, 포장마차 구석 자리에서, 소주잔을 쥐고 울었다. 소리를 죽이려 했지만 어깨가 먼저 흔들렸다.
"우리 나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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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마차 주인 아주머니가 뒷걸음으로 다가와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총각, 이제 마감이야. 어여 가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한 번 더 등을 밀었다. 부드러웠지만 분명한 신호였다. 남자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소주잔을 놓고, 지갑에서 남은 돈을 꺼내 탁자에 올렸다. 얼마인지 세지 않았다.
포장마차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한강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남자는 걸었다. 방향이 없이 걸었다. 불빛들이 흔들려 보였다. 술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모든 것이 흔들리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뒤에서였다.
"김명령 씨 맞죠?"
남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한테 볼일이 있으면 따라오면서 말하세요."
"워, 진정하시고요. 저 싸우려는 게 아닙니다."
목소리가 차분했다. 억지로 차분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본래 그런 사람의 목소리였다. 남자는 발걸음을 늦추며 고개를 돌렸다.
검은 정장이었다. 검은 중절모. 서른 남짓 되어 보이는 얼굴. 이목구비가 단정했지만, 눈이 작고 좁아서 첫 인상이 좋지 않았다. 눈을 뜨면 쉽게 사나워 보이는 눈이었다.
"이름을 어떻게 알죠?"
"앉아서 얘기하시죠. 저기 벤치에."
"내가 앉아야 할 이유가 있나요?"
"이지수 씨 정보가 있습니다."
남자가 멈췄다.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정장의 남자가 가로등 빛 아래 서 있었다.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떤 감정인지 읽히지 않는 미소였다.
"그 이름을 당신이 어떻게 알죠."
"앉으시죠. 이야기가 좀 깁니다."
남자는 잠깐 그를 바라보았다. 도망갈 수도 있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리를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지수라는 두 글자가 다리를 붙잡았다.
벤치에 앉았다.
검은 정장의 남자가 맞은편에 앉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중절모 챙을 살짝 고쳐 쓰는 동작이 어딘가 오래된 예의 같기도 했다.
"본론부터 말씀하세요. 지수 정보가 뭡니까."
"우선 이야기 하나를 먼저 들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드리는 정보가 맥락이 있거든요."
"말하세요. 빨리."
"옛날이야기입니다. 어릴 때 읽어보셨을 겁니다. 나그네가 지나가는데, 해님과 바람이 내기를 했죠. 나그네의 옷을 먼저 벗기는 쪽이 이긴다는 내기."
"그거 동화잖아요."
"맞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결말과 실제 결말이 다릅니다."
남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검은 정장의 남자가 계속했다.
"사람들은 해님이 따뜻하게 해서 나그네가 외투를 벗었고, 해님이 이겼다고 알고 있죠. 그런데 실제로 내기에서 먼저 이긴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뭐가 다르죠."
"바람이 너무 강하게 불었습니다. 나그네가 날아갔어요. 그 과정에서 옷이 벗겨졌죠. 내기는 바람이 먼저 이겼습니다. 그런데 나그네가 너무 높이 올라가버려서 떨어져 죽었어요. 결말이 너무 처참해서, 사람들이 해님의 승리로 이야기를 고쳐 전했다는 겁니다."
"그게 저랑 무슨 관계입니까."
"그 내기의 상품은요."
검은 정장의 남자가 잠깐 말을 멈췄다. 가로등 빛이 그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여섯 번째 세상의 파멸이었습니다."
남자는 그를 바라봤다.
"천사와 저는 한 몸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태고부터 그래왔어요. 번갈아가면서. 미카엘이 몸의 주인일 때는 세상이 풍요롭고, 제가 주인일 때는 전쟁과 재해가 끊이지 않죠. 세상을 몇 번 파멸시킨 적이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 들어보셨죠."
"지금 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검은 정장의 남자가 중절모 챙 아래로 눈을 들었다.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가 다시 열렸다.
"저는 루시퍼입니다." 제 이름이 그렇습니다."
"장난하시는 거죠."
"흠흠. 악마들은 원래 장난을 좋아하기는 합니다만, 지금은 아니에요. 저희가 하는 내기에 나그네가 필요합니다. 이번이 여섯 번째 내기고요. 나그네로 선택된 분이 김명령 씨, 당신입니다."
"내가요."
"네."
남자는 말문이 막혔다. 술이 덜 깬 것인지, 이 상황이 실제로 이런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자칭 루시퍼라는 사람이 벤치에 앉아 여섯 번째 세상의 파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당신이 만약에 진짜라면."
남자가 천천히 말했다.
"내가 겪은 모든 일의 원인이 당신이라면, 당신이 신이든 뭐든 상관없이 죽여버리겠습니다."
루시퍼라고 자칭한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소름이 돋을 것 같은 웃음이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실 겁니다. 저는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거든요. 죽음이 제 존재의 일부니까요."
"이지수 어딨습니까."
남자가 눌러 물었다. 웃음에 지지 않으려는 목소리였다.
"인형사를 찾으셔야 합니다."
"인형사?"
"사건의 원흉입니다. 당신과 당신 딸을 죽인 자도 그입니다."
남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뭐라고 했습니까."
"인형사. 그를 찾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저의 관대함으로, 한 번 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좀 잘 쓰시기 바랍니다."
"잠깐, 지금 무슨."
무언가가 번쩍였다.
눈앞이 흰빛으로 가득 찼다. 빛이 사라지는 순간, 남자는 자신의 발이 보였다. 바닥이 보였다. 몸이 아래로 무너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상했다. 쓰러지는데 통증이 없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이 이상했다.
자신의 몸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목과 몸이 분리된 채로.
남자는 그 광경을 보았다. 자신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벤치 아래, 가로등 아래, 검은 정장의 남자 발 앞에 쓰러진 자신의 몸을.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바람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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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서 탄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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