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밥상 위의 칼날
마당 한가운데서 나는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봄 하늘은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저 하늘 아래 백호문의 기왓골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고, 담 너머로 새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살아 있는 것들의 소리였다. 나는 그것이 낯설었다. 전생의 마지막 기억 속 백호문에서 들려오던 소리는 새소리가 아니었다. 쇠 부딪히는 소리, 뼈가 으러지는 소리, 그리고 울음조차 내지 못하고 쓰러지던 사람들의 마지막 숨소리였다.
"소운아! 오늘 오후에 나랑 목검 대련 할래?"
마진 사형의 목소리가 마당 저편에서 날아왔다. 스물이 가까운 사내가 스무 살짜리 총기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넓은 어깨, 우직하게 다문 입술. 전생에서 그 입술이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말하려다 끝내 닫힌 적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 그 입술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네, 사형. 오후에 뵙겠습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의 근육을 의도적으로 올렸다. 웃음이란 게 이렇게 무거운 것인 줄, 죽어봐야만 알 수 있다. 마진 사형은 씩 웃으며 훈련장 쪽으로 사라졌고, 나는 다시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품 안의 구결을 손으로 짚었다. 풍운심법. 사부가 내 단전을 빚어내기 위해 고른 첫 번째 도구. 그 도구를 내가 먼저 쥐었다.
밥상이 차려지는 소리가 안채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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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찬상은 늘 안채 대청에서 받았다. 백호문주 진광호가 그렇게 정해두었다. 아침마다 가솔들이 한데 모여 밥을 먹는 것이 가문을 이루는 기둥이라고, 아버지는 늘 말했다. 전생에도 그 말을 들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그냥 지나쳤던 말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나는 대청 앞 섬돌에서 신발을 가지런히 벗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밥 짓는 냄새와 된장국 냄새가 한꺼번에 코를 쳤다. 익숙한 냄새인데 낯설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 냄새를 26년 만에 맡는 까닭이겠지. 아니, 죽은 뒤에야 비로소 그 냄새가 무엇인지 알게 된 까닭이겠지.
어머니가 상 앞에 앉아 있었다.
소채(蘇彩). 진광호의 아내, 나의 어머니. 전생에서 그녀는 아버지보다 사흘 늦게 죽었다. 한천악의 부하들이 그녀를 찾아냈을 때, 그녀는 이미 검을 들고 있었다. 무공도 없는 몸으로 검을 들었다.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었다.
"소운아, 어서 앉아라. 얼굴이 왜 그러니?"
어머니가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표정을 지웠다. 어머니는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무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사람의 감정을 읽는 데에는 누구보다 예민했다. 그것도 전생에서 배운 것이다.
"잠을 조금 설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설쳐? 너 같은 애가 잠을 설쳐?" 어머니는 혀를 찼다. "어지간히도 쉬어빠졌구나. 어서 앉아."
꾸중인지 걱정인지 모를 말투였다. 그것도 어머니답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무릎에 올려놓은 두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 나는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두 손을 깍지 꼈다.
아버지는 조금 늦게 들어왔다. 진광호. 백호문주.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으며, 눈가에 주름이 잡혔지만 시선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회색 도복을 단정히 여미고 자리에 앉는 모습에서, 전생에 내가 그토록 닮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가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다들 앉았느냐."
아버지가 나를 한 번 훑어보았다. 내 눈과 그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피해서는 안 됐다. 아버지는 시선을 먼저 거두는 자를 약하다고 여겼다. 그것 역시 전생에서 배운 것이었다.
"풍운심법 구결을 받았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젓가락을 들기 전에 먼저 말했다. 어머니는 국을 뜨다가 잠깐 손을 멈췄다.
"네. 사부께서 어제 주셨습니다."
"한 사부께서 오래 아꼈던 심법이다. 함부로 굴리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짧은 대화였다. 하지만 그 짧음 안에 아버지의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한천악을 믿었다. 전생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그 믿음이 아버지를 죽였다. 그 믿음이 백호문 삼백 명을 죽였다. 그 믿음을 지금 나는 속으로 씹고 삼켜야 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밥알이 혀 위에 닿았다. 따뜻했다. 지나칠 정도로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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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으면서 나는 아무것도 맛보지 못했다. 입 안에서 씹히는 감각은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느껴지지 않았다. 시선은 밥상에 고정되어 있었고, 귀는 어머니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소리를 따라갔지만, 머릿속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아버지의 손이 보였다.
검을 쥐어온 손이었다. 마디마디가 굵고 거칠었다. 그 손으로 아버지는 백호문을 이끌었다. 그 손으로 나를 처음 검 앞에 세웠다. 그 손이 마지막에는 이미 검조차 쥐지 못한 채 땅바닥에 놓여 있었다. 전생의 기억 속 아버지의 손은 더 이상 거칠지 않았다. 핏기가 없어 하얗게 바랜, 꺾인 손이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나는 단전 쪽으로 의식을 모았다. 전생에서 단련해온 버릇이었다. 진기를 운용해 감정의 파도를 잠재우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단전은 열세 살짜리 껍데기였다. 들이켜려는 진기가 없었다. 비어 있었다. 그 빈 곳에서 분노가 더 크게 끓었다.
가슴 한가운데가 뜨거워졌다.
전생에서 칼이 들어오던 자리였다. 사부 한천악의 검. 그것이 피부를 가르고 들어오던 순간의 차가운 감촉이 역류하듯 살아났다. 뜨겁고 차가운 것이 동시에 밀려오는 그 이상한 감각.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그것이 지금 이 밥상 앞에서 되살아났다.
어머니가 웃으며 무언가를 말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담 밖에서 사형들이 떠들며 지나갔다. 세상은 너무나 평온했다.
나는 눈꺼풀 안쪽을 힘주어 닫았다. 속으로 한 글자씩 새겼다.
기다려라.
지금은 아직 아니다.
너는 현경(玄境)이고 나는 입문기다. 지금 칼을 들면 그것은 복수가 아니라 자멸이다. 사형들을 다시 잃는다. 아버지를 다시 잃는다. 어머니를 다시 잃는다. 전생과 똑같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끝이 난다. 나는 그것을 안다. 죽어봤기 때문에 안다.
그러니 기다린다.
밥을 씹고, 웃고, 고개를 끄덕이고, 사부의 자상한 눈빛 앞에서도 감사한 척하며 기다린다. 14년이다. 14년 뒤 마교와 정파 사이에 대전이 벌어지고, 그 전에 나는 사부의 가면을 벗겨 강호 전체 앞에 세울 것이다. 그 순간까지 나는 어떤 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어떤 것도.
두 손이 무릎 위에서 떨렸다.
나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꽉 쥐었다. 손가락이 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주었다. 그렇게 분노를 안으로 눌렀다. 밖으로는 아무것도 새어나가선 안 됐다. 단 한 줄기도.
"소운아, 반찬이 입에 안 맞니?"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도 시선이 내 쪽을 향해 있었다. 나는 잠깐 두 박자쯤 멈췄다가 웃었다. 입술의 근육을 올렸고, 눈가에 힘을 주어 주름을 만들었다.
"아니요. 맛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안도하며 다시 수저를 들었다. 아버지도 시선을 거뒀다.
나는 다시 밥을 입에 넣었다.
따뜻했다. 지나칠 정도로 따뜻했다. 그리고 나는 그 온기를 혀 위에서 녹이며 생각했다. 이 따뜻함이 살아 있는 증거다.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 나는 죽은 자처럼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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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찬이 끝난 뒤 아버지는 문도들을 이끌고 아침 수련을 나갔다. 어머니는 안채에 남아 살림을 챙겼다. 나는 빈 대청 한구석에 잠시 앉아 있었다. 밥상을 물리고 난 자리에 햇살이 길게 드리워졌다. 먼지가 빛 속에서 천천히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나는 품 안에서 풍운심법 구결을 꺼냈다.
얇은 종이 두 장이었다. 사부의 단정한 필체로 빼곡히 채워진 구결은 겉으로 보면 정파의 정통 심법 그 자체였다. 흐름이 유려하고, 진기의 운용법이 정교했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훌륭한 스승이 뛰어난 제자에게 건넨 귀중한 가르침으로만 보일 것이었다.
하지만 내 시선은 그곳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이 구결의 열아홉 번째 줄부터 스물세 번째 줄, 그 다섯 줄은 다른 구결과 결이 다르다. 미세하게. 심법의 흐름이 단전을 향해 모이지 않고, 단전 밖 경맥(經脈)으로 흘러나가도록 짜여 있다. 수년에 걸쳐 그것을 운용하면 단전이 바깥으로 열린다. 스스로는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천천히, 자연스럽게.
그렇게 열린 단전에 한천악의 천마검이 꽂히는 것이다.
전생의 나는 그것을 몰랐다. 사부가 건네는 대로 받아 운용했고, 스물셋이 됐을 무렵에는 이미 단전이 서서히 변질돼 있었다. 그리고 스물여섯에 가슴을 꿰뚫렸다.
나는 다섯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지워서는 안 된다. 이 구결이 원본 그대로라는 것을 사부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것을 받아서 운용하는 척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백호심법의 수기(手記) — 전생에서 내가 스스로 재해석해 완성한 운기법 — 와 이 구결을 접합한 자신만의 경로로 단전을 쌓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사부가 심어둔 설계는 무효가 된다. 그리고 나는 사부의 천마검에 맞을 그릇이 아닌, 사부를 역으로 베어낼 칼날로 거듭날 것이다.
나는 구결을 다시 접어 품 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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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장에서 사형들의 기합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청 밖으로 나섰다. 섬돌 위에 서서 훈련장 쪽을 바라보니 마진 사형이 목검을 어깨에 걸치고 막내 사제들을 지도하는 것이 보였다. 크고 투박한 몸짓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언제나 진심이었다.
사형이 어떻게 죽는지 나는 그것을 알았다. 한천악의 계략에 의해, 그것도 이사형 조경의 손에 의해. 조경의 발걸음이 한 박자씩 느렸다. 어디로 가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마진 사형은 그것을 모른 채 등을 내줬다. 그것은 이미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을지도 몰랐다.
바꿔야 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아니다. 조경의 배신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누가 처음 그의 마음에 손을 댔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아직 내가 아는 것이 결과뿐이었다. 결과만 아는 자는 원인을 막을 수 없다.
마진 사형이 훈련장 저편에서 나를 발견하고 손을 들어 보였다. 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 답했다.
오후의 목검 대련. 그것이 오늘의 시작이었다.
전생의 나는 열세 살 때 이 대련에서 사형에게 열 번을 내리 졌다. 지금도 몸은 열세 살이었고 단전은 입문기였다.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는 것에도 방법이 있다. 전생 26년치의 무공 이론을 머릿속에 담은 채로 지는 것과, 아무것도 모른 채로 지는 것은 다르다.
나는 섬돌에서 내려와 훈련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늘의 대련에서 나는 딱 한 수만 제대로 쓸 것이다. 열세 살의 몸이 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러나 열세 살이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방식으로. 그것이 사부의 눈에 걸리지 않을 정도의 선이어야 했다. 너무 강해도 안 되고, 너무 약해도 안 됐다. 14년의 계획은 단 하루라도 삐끗하면 무너진다.
봄볕이 훈련장 흙바닥 위로 내리쬐었다. 나무 목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자코 걸었다.
지금 이 모든 것이 살아 있다. 소리도, 냄새도, 햇살도. 그리고 나도.
그것이면 충분했다. 오늘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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