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티노 칸타레》 5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클럽 지하층의 공기는 숨통을 조였다.
담배 연기, 땀, 향수가 뒤섞인 냄새가 천장에 층층이 눌려 있었고, 스피커에서 쏟아지는 베이스는 가슴팍을 넘어 명치 아래까지 파고들었다. 박세나는 그 소음 속에서 몸을 흔들며 반쯤 정신을 놓았다. 스트레스를 씻어내러 왔다.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다. 조명이 빨갛게 번졌다가 파랗게 꺼지기를 반복했고, 주변의 얼굴들은 유령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옆에서 누군가의 허리를 감싼 채 정신이 반쯤 나간 친구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뭐라고?"
"화장실 간다고!"
"어, 잘 다녀와."
친구의 입꼬리가 웃음으로 올라갔고, 박세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몸에 땀이 찝찝하게 흘렀다. 화장도 고쳐야 했다. 박세나는 군중 사이를 뚫고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아래 얼음 녹은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고, 굽이 거기에 한 번 빠졌다가 빠져나왔다. 지하 복도는 클럽 내부보다 조용했다. 베이스 소리가 벽 너머로 쿵쿵 울릴 뿐, 사람 목소리는 여기까지 닿지 않았다.
여자 화장실 입구 앞에 남자 셋이 서 있었다.
덩치가 컸다. 박세나는 처음에 잘못 본 줄 알았다. 좁은 복도에 남자들이 왜 여자 화장실 앞을 가로막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발 더 다가가서야 그들이 의도적으로 입구를 막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여자 화장실인데요. 저리 비켜줘요."
남자 중 하나가 몸을 틀며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정중했는데, 그 정중함이 오히려 이상했다.
"아가씨, 지금 안에 못 들어가니 2층으로 가세요."
"너무 급한데요."
박세나는 그 말을 뱉는 순간 이미 옆으로 몸을 비틀어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남자들이 손을 뻗을 틈이 없었다. 좁은 통로 사이를 오가는 것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클럽 바닥을 뚫고 다니면서 얻은 본능이었다.
"뭐야, 입구 확실히 막으라고 했잖아!"
화장실 안에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박세나는 그 소리에 발을 멈췄다.
거울 위에 조명 세 개가 켜져 있었다. 세면대 옆 타일 바닥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무릎이 꺾인 채였다. 얼굴이 피로 덮여 있었다. 입이 반쯤 벌어진 상태로, 흉곽이 아직 아주 얕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박세나의 목구멍에서 비명이 올라왔다.
비명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등 뒤에서 팔이 날아들었다. 입이 막혔다. 목에 차가운 금속 감촉이 닿았다. 칼날이었다.
귀에 바짝 붙은 목소리가 낮고 느리게 흘러들었다.
"살고 싶으면 조용히 해. 두 번 말 안 한다."
박세나는 숨을 멈췄다. 심장이 박동을 멈추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몸이 굳었다. 거울 속에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눈이 커진 채 흰자가 드러나 있었다.
화장실 안쪽, 세면대 너머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아야, 너무 겁주지 마라. 저쪽 놈이 어딘가에 있는 건 확실하니까 빨리 잡아."
"네, 형님."
'형님'이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화장실 안에 있던 열 명 가까운 남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두 명은 박세나 뒤편 통로 쪽으로 빠져나갔고, 나머지는 칸막이 안쪽을 확인하거나 창문을 살폈다. 소리 없이, 그러나 빠르게 움직이는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 곁을 지나 걸음을 내딛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박세나의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키가 큰 남자였다. 이목구비가 또렷했고, 눈에는 쉽게 읽히지 않는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흥분이나 공포가 아니었다. 차라리 무덤덤에 가까웠다. 옷매무새는 단정했는데, 그 단정함이 바닥의 피투성이 남자와 어울리지 않아 도리어 기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남자가 입을 씰룩이며 말했다.
"여자 화장실에서 이래서 미안하오. 아가씨, 살고 싶으면 지금 당장 뛰어가쇼. 2분 줄게. 아야, 놔줘."
칼이 목에서 물러났다. 박세나의 몸을 붙들던 팔이 빠져나갔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박세나는 그 눈빛 하나로 이게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 눈은 거짓말을 하는 눈이 아니었다. 무서운 것은 목에 닿았던 칼날이 아니었다. 저 눈이었다.
박세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복도, 계단, 클럽 내부, 출구. 굽이 한 번 꺾일 뻔했지만 박세나는 멈추지 않았다. 친구도 찾지 않았다. 클럽 외부 계단을 뛰어올라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 밤공기가 얼굴에 부딪혔다.
그리고 등 뒤 지하에서, 총성이 두 번 울렸다.
박세나는 달리는 채로 어깨를 움츠렸다. 발이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죽는다는 생각이, 달리는 다리보다 먼저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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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 VIP룸은 지하의 소란과 달리 조용했다.
방음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아래층의 소음이 멀게 들리는 것은 이 방이 다른 세계처럼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카펫은 두꺼웠고, 조명은 낮고 붉었다. 창문 바깥으로는 서울 야경이 펼쳐져 있었는데, 오늘따라 그 불빛들이 모두 바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민한수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
잔을 비운 적은 없었다. 술을 마시러 온 자리가 아니었다. 손에 뭔가를 쥐고 있으면 생각이 더 잘 됐다. 아니, 정확히는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부하들이 아래층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 서산에서 올라온 풋내기들이었다. 이름도 낯선 패거리였다. 민한수가 알기로는 전라도 쪽 끄트머리에서 올라온 잡배들이었는데, 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고 여기까지 기어올라왔는지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죽이지 말고 잡아 오라고 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부하들은 잘 움직였다. 민한수는 그 점에서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 불안을 느끼는 것은 오히려 이 조용한 방, 이 창문 너머의 야경 앞에서였다. 야경이 아름다울수록 그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샴페인 거품이 잔 안쪽에서 올라오다 사라졌다.
오늘 밤 왜 그 기억이 떠오르는지 민한수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15년 전.
아니, 정확히는 그 길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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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학교에서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놈이 단 하나 있었다. 단순히 무서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었다. 열여덟 번을 싸워서 열여덟 번을 졌다. 18전 18패. 민한수는 그 숫자를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 놈은 민한수가 기억하는 어떤 상대와도 달랐다. 덩치가 압도적으로 크지도 않았다. 싸움꾼 특유의 헤벌어진 눈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학교에서는 범생이 소리를 들었다. 수업을 잘 따라갔고, 담임한테 불려가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 막상 맞붙으면 달랐다. 민한수의 주먹이 닿는 순간 몸이 이미 거기에 없었다. 빠른 것인지 예측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민한수는 18번의 싸움 중 단 한 방도 얼굴에 제대로 꽂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19번째였다.
길목에 먼저 나와서 기다렸다. 담배를 꼬나물었다. 긴장을 풀기 위해서였는데, 오히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멀리서 그 놈의 그림자가 보였다. 민한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놈이 지척까지 왔을 때 민한수는 몸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그 놈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도 담배 한 대만."
민한수는 그 말에 어리둥절했다. 범생이가 담배를 피우는지 몰랐다. 생각보다 태연한 그 얼굴이 민한수를 오히려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 그 놈은 민한수 입에서 담배를 가로채 한 모금 빨았다.
"오늘 어머니 기일이라 그냥 가라. 아버지 아시면 속상해 하신다."
민한수 안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기일? 사람 죽일 때 기일을 가려가며 죽이냐고.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것과 동시에 주먹이 날아갔다. 그 놈은 민한수의 주먹 방향을 손으로 비틀어 흘렸다. 이번에도 같았다. 그리고 정강이가 민한수의 무릎 뒤쪽을 걷어찼다. 중심이 무너졌다. 그 찰나에 뒤돌려차기가 얼굴에 들어왔다. 레프트 잽 하나. 반대편에서 다시 돌려차기 한 방. 눈 앞이 반쯤 흔들렸다.
너무 빨랐다.
민한수는 땅에 무릎이 닿으면서 자신이 다시 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수치가 열기처럼 올라왔다.
"오늘은 진짜 아니라고 했잖아. 더 까불면 봐줄 수 없으니까 그냥 가."
그 놈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화를 내지 않았다. 그게 더 치욕스러웠다. 분노조차 받아주지 않겠다는 태도. 민한수는 입술이 갈라진 채로 땅을 짚었다.
동네 양아치들이 저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이 들어갔다.
오늘을 위해 준비했다. 나이프였다. 오늘 이걸 안 쓰면 평생 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냥 지면 끝이었다.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이었다. 양아치로 살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손가락이 나이프 손잡이를 감쌌다.
그 순간이었다.
"형!!"
목소리가 뒤에서 날아들었다. 어린 목소리였다. 초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놈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민한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냈다. 손을 뻗었다.
칼끝이 배에 꽂혔다.
'푹.'
그 소리가 이상하게 선명했다. 민한수는 나이프를 더 밀어 넣었다. 어딘가에서 봤던 것처럼 손목을 비틀었다. 손에 닿는 감촉이 상상과 달랐다. 이건 그냥 더럽고 뜨거웠다. 살이 열리는 촉감이 이런 것인 줄 몰랐다. 손에서 뭔가가 흘렀다.
"컥헉……이새끼."
그 놈의 목소리가 낮아지면서 몸이 기울었다.
민한수는 뒤로 물러서며 웃었다. 웃음이 나왔다. 왜 나오는지 몰랐다. 두려워서 웃은 건지, 이겼다는 생각에 웃은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이미 몸이 뒤로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형!!!!!!!"
그 소리가 등 뒤에서 터졌다.
민한수의 발이 멈췄다.
아니었다. 멈추지 않았다. 몸은 계속 달렸다. 그런데 뒤를 돌아봤다. 왜 돌아봤는지 몰랐다. 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었는데 고개가 먼저 돌아갔다.
아이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형이라고 부른 그 아이. 열 살이나 됐을까. 형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고개를 파묻은 채 울고 있었다.
그 순간,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민한수는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울고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 그 눈 안에 있는 것은 슬픔만이 아니었다. 너무 어린 얼굴에 담기기에는 너무 날카롭고, 너무 선명하고, 너무 차가운 무언가였다. 섬뜩했다. 민한수가 그 눈빛에서 느낀 것은 그 한 단어였다.
그 놈 동생이었다. 도철이라고 형이 불렀다. 유도철.
민한수는 뒤돌아 달렸다.
그 날 이후 민한수의 삶이 꺾였다.
16시간의 수술에도 그 놈은 살아나지 못했다. 민한수는 소년원에 들어갔다. 초범에 우발적 범행, 심신미약이 적용됐다. 10년형이 선고됐고, 모범수로 8년 만에 출소했다. 민한수는 그 8년이 길었는지 짧았는지 지금도 판단하지 못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기억이 명확하지 않았다. 소년원에서 성인이 되어 교도소로 이송될 무렵, 구성파 두목의 눈에 들었다. 막내 한 명을 키우겠다는 말이었다. 민한수는 나가기만 하면 길이 열릴 것을 알고 있었다.
출소 날이었다.
교도소 정문을 나서는 순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안경을 쓰고 있었다. 키가 그리 크지 않았고, 인상은 평범했다. 정문 앞에서 가만히 서서 민한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한수 씨죠?"
"누구요."
"유도철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이 처음엔 뇌에서 튕겨나갔다. 그러다 0.5초 뒤, 8년 전 그 눈빛이 번졌다. 울면서도 섬뜩했던 그 눈. 도철. 그 아이였다. 어린아이가 청년이 돼 있었다.
"니가 왜……꺼져, 할 말 없다."
민한수는 뒤로 물러서려 했다. 몸이 저절로 벌어지려 했다. 그 눈빛의 기억이 발을 움직이게 했다.
도철이 앞을 막아섰다. 손을 내밀었다.
"악수 먼저 하시죠."
"꺼지라고. 할 말 없으니까. 사과라도 받고 싶냐!"
그 순간 도철의 손이 움직였다. 손바닥이 민한수 뺨을 갈겼다.
짝.
민한수는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면서 멍해졌다. 교도소에서 나온 지 5분도 안 됐다. 정문 앞에서 방금 뺨을 맞았다. 8년 만에 바깥 공기를 마신 첫날이었다.
도철이 안경을 벗었다. 눈빛이 드러났다. 8년 전 그것이었다. 차갑고 선명했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때리고 나서 사과한다고 나아지는 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목소리가 냉정했다.
"당신은 지금 한 대 맞아서 열받죠? 저도 당신이 우리 형을 죽여서 열받습니다. 죽이고 싶은 정도로요."
민한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구성파에 8년 머물면서 조폭 세계의 윗선을 경험했다. 사람 위에 사람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그런데 이 청년 앞에서 다리에 힘이 빠졌다. 형하고 똑같았다. 이 냄새, 이 분위기. 절대 이길 수 없겠다는 느낌.
"쫄지 마세요, 민한수 씨."
도철이 말했다.
"당신을 당장 죽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겠습니다. 지난 8년 동안 많이 생각했어요. 어떻게 당신을 써먹을 수 있을지."
민한수의 눈이 좁아졌다.
"저는 내일모레 군대 입대합니다. 당신은 구성파에 들어가겠죠. 2년 동안 실컷 즐기고, 실컷 싸우면서 구성파 정점에 오를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2년 뒤 이 시간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도철은 뒤돌아서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였다.
"당신이 어딨는지 제가 반드시 찾아낼 테니 도망치진 마세요. 어떻게든 찾아낼 겁니다. 꼭 즐기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청년은 멀어졌다.
민한수는 교도소 정문 앞에서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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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도철은 전역 후 민한수를 찾아냈다. 이번에도 피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한번은 부하들을 시켜 도철을 처리하려 했다. 도철은 그 부하들을 한 명씩 찾아다녔다. 사지를 하나씩 망가뜨렸다. 민한수에게 전갈이 왔다. 메시지는 짧았다.
'시간 낭비 말라고 전해. 당신은 도망칠 수 없다고.'
민한수는 그 이후로 도철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도철이 자신의 삶 어딘가에 묶여 있다는 것이 민한수를 오히려 집중하게 만들었다. 도철이 원하는 정점에 올라야 했다. 올라서야 도철이 원하는 것을 써먹어 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 그 청년이 마침내 자신 앞에서 다시 서겠지. 그때 어떻게 할지는 그때 생각할 일이었다.
세월이 쌓였다.
민한수는 현재 대한민국 조폭계 넘버원이었다. 배후가 있었다. 그 배후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오늘 이 클럽도, 이 지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도, 민한수가 관리하는 구역 안에 있었다. 서산에서 올라온 잡패들이 이 구역을 노리고 침입했다.
그리고 도철은 지금 언론사에 다니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가 됐다. 조폭 관련 사건만 취재했다. 3년 만에 독보적인 별명을 얻었다. '조폭 낚는 슈퍼기레기.' 아무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심지어 조폭들조차 그를 형님으로 모셨다. 무엇으로 그 자리에 올랐는지, 민한수는 대략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도철은 아직 민한수를 놓아주지 않았다.
VIP룸 아래층에서 소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부하들이 마무리 짓는 소리였다. 민한수는 샴페인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잔이 천천히 기울며 거품이 안쪽을 따라 흘렀다.
그 놈. 그 놈이 죽던 날 밤의 기억이 지금 왜 이렇게 선명한지 알 수 없었다. 15년이 지났다. 그러나 어떤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희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해가 갈수록 윤곽이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었다. 그 길목, 그 나이프, 그 소리, 그 눈빛.
도철의 눈빛.
민한수는 창밖을 바라봤다. 서울의 불빛이 촘촘하게 배열돼 있었다. 저 불빛들 어딘가에 도철이 있었다. 오늘도 무언가를 계획하고, 무언가를 움직이고 있을 것이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
그 말이 민한수의 뇌리에 툭 하고 떠올랐다.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없었다. 그냥 그 말이 오늘 밤 이 자리에서 떠올랐다. 그 놈은 죽었다. 죽어서 무엇을 남겼나. 동생이었다. 도철이었다. 그 눈빛을 가지고 민한수의 인생 한 귀퉁이에 단단히 박혀 있는 그 청년이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겼다.
그 가죽은 살아 있었다.
부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형님, 마무리됐습니다. 세 놈 잡았고 두 놈은 도망쳤는데 차 번호 땄습니다."
"잘했어. 잡아온 놈들 VIP룸 올려보내."
"네."
문이 닫혔다.
민한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넥타이를 한 번 매만졌다. 오늘 밤 도철의 생각이 이렇게 오래 이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오늘 낮에 도철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짧은 문자였다.
'곧 봅시다.'
민한수는 그 세 글자를 여섯 번쯤 읽었다.
그 놈이 뭔가를 다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도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무언가가 마침내 준비됐다는 뜻이었다. 그 계획이 무엇인지 민한수는 정확히 몰랐다. 아마 알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도철은 항상 필요한 것만 알려줬다.
VIP룸 문 앞에서 민한수는 잠깐 멈췄다. 손을 문손잡이에 올리면서, 15년 전 나이프를 쥐던 그 감촉이 손바닥에 스쳤다. 따뜻하고 더러운 그 감촉.
그것은 평생 손에서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민한수는 오래전에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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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일 년 전.
유도철이 검사를 처음 만나던 날이었다.
김도겸. 검사 부임 7년 만에 부장검사로 승진한 남자였다. 검찰 내에서 촉망받는 이름이었고, 장인이 한병진 국회의원이었다. 도철은 그 이름을 오래전부터 주시하고 있었다.
약속은 외부 커피숍이었다. 도철이 먼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김도겸 검사님이시죠?"
"네, 누구십니까."
"유도철 기자라고 합니다."
"아, 기자님이……무슨 일로?"
"검사님, 지금 조폭 연쇄 살인 사건 수사 중이시죠?"
검사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극비 사항인데 기자님이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제가 별명이 좀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쥐새끼입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이 있죠."
도철이 쑥스러운 척 어깨를 으쓱했다.
검사의 눈에서 계산이 돌아갔다. 합동수사팀 안에 입 가벼운 형사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도철은 그 계산이 돌아가는 것을 보며 기다렸다.
"좋습니다. 기자님 패를 먼저 열어 보시죠."
"서울의 구성파와 전라도 전갈파가 대립 중인 건 아시죠? 그래서 전갈파 주요 인물들이 용의선상에 올라 있고요. 하지만 검사님, 헛다리 짚으셨습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도철은 속으로 웃었다. 덥석 문 것이었다. 극비라고 했는데 '헛다리'라는 말에 부인하지 않고 반응했다. 자신이 전갈파를 보고 있다는 것을 방금 확인해 준 것이었다.
"아직 그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곧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검사님도 알고 싶으시다면 그만한 대가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뭘 어떻게 안다는지 모르겠지만……확실히 알아내면 그때 다시 얘기하시죠."
검사가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한미라."
도철이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 와이프. 장인은 한병진 국회의원이고, 당신이 그렇게 초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장인의 권력 때문이죠. 그리고 한병진이 구성파를 뒤에 두고 한 모든 더러운 일, 당신이 다 막고 있는 거 아닌가요?"
검사의 등이 굳었다. 손바닥에 땀이 나는 것을 도철은 보지 못했지만, 어깨 근육이 변하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검사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결론이 내려지는 순간이 있었다.
도철은 눈빛에서 그것을 읽었다.
'이놈은 살려둬서 안 된다.'
그 순간 도철의 눈이 가늘어졌다.
낚았다.
"유도철 기자님, 안녕히 가십시오.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또 뵙죠."
검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도철은 대꾸하지 않고 뒤돌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재킷 단추를 잠갔다. 어떤 방식으로든 검사 쪽에서 먼저 연락이 올 것이었다. 그것이 협력이든 제거 시도든.
도철은 그것을 기다렸다. 어느 쪽이든 자신에게 유리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이유를 도철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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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죽던 날 밤이었다.
병원 복도에서 의사의 말을 들었다. 16시간의 수술 끝에 형이 떠났다는 말이었다. 도철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울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 수술실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알았다. 의사의 표정에서 알았다. 눈물은 그 이전에 이미 다 말라 있었다.
전화가 왔다.
번호가 없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유도철 님. 반갑습니다. 저는 형님과 꽤 친분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형님이 그렇게 가시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직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모르는 건 없지요."
목소리에 헛기침이 섞였다. 남자였다. 인상이 창백할 것 같았다. 목소리만으로도 그 느낌이 왔다.
남자는 지금 있는 병원 건물 옥상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도철은 올라갔다.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멈추고 싶었는데 멈출 수 없었다.
옥상에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정장이었다. 인상은 창백하고 서늘했다. 자신을 루시퍼라고 소개했다. 형이 '나그네'였으나 뜻밖의 방해로 인해 나그네를 잃게 됐다는, 도철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다음 나그네로 도철이 선발됐다는 말을 했다.
도철은 형을 잃은 날이었다. 빨리 내려가서 쉬고 싶었다. 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루시퍼는 도철에게 기프트를 준다고 했다. 계획을 세우면 대부분 이루어지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이 나라 뒷세계를 장악하라고 했다. 쥐새끼들의 왕이 되라고 했다. 그리고 서브 미션이 하나 있었다. 한미라라는 여자와 딸을 하나 낳으라는 것이었다.
도철이 다음으로 눈을 떴을 때는 응급실이었다.
꿈 같았다. 그 전화번호로 다시 걸어봤지만 없는 번호였다.
그러나 도철은 형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자신 안에서 무언가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계획이 세워졌다. 민한수를 죽이고 싶다는 충동은 그대로였지만, 죽이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그를 써야 한다는 생각이 뒤이어 올라왔다. 그 생각은 이상하리만치 구체적이었다. 구체적이고 자연스러웠다.
도철은 형을 생각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
형이 호랑이였다면, 자신은 가죽이었다. 형은 떠났지만 가죽은 남았다. 가죽은 닳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써야 한다. 형이 남긴 분노로 무언가를 만들어야 했다.
쥐새끼들의 왕. 루시퍼가 그렇게 부르라고 했다.
도철은 그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어차피 그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형이 죽은 자리에서 도철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는 움직여야 했다. 그것이 도철이 내린 결론이었다. 눈물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었다. 형이 남긴 무게를 어깨에 걸치고 앞으로 가는 것. 그것이 가죽으로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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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P룸으로 잡아온 놈들이 올라왔다.
민한수는 의자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 셋이었다. 둘은 얼굴에 멍이 들어 있었고, 하나는 팔을 감싸쥐고 있었다. 부하들의 솜씨였다.
"서산 어디서 올라왔어."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민한수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한 번 두드렸다. 소리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방 안에 그 소리만 남았다.
"누가 보낸 거야."
세 명 중 가운데 있는 놈이 입술을 실룩였다. 뱉으려다가 참는 모양이었다.
민한수는 일어서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채로 그 놈을 바라봤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여기서 침묵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가운데 놈의 어깨가 천천히 내려갔다.
민한수는 그것을 보며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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