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티노 칸타레》 9화. 도깨비 감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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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D
《데스티노 칸타레》  · 

김명령은 정처 없이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아무런 목적도 없이 발을 옮겼다. 낡은 운동화 바닥을 통해 아스팔트의 거친 감촉이 무감각하게 전해졌다. 시야는 흐릿했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가득 채웠던 아침 햇살은 의미를 잃고 빛의 파편으로 흩어졌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5년이란 세월을 바쳐 찾아 헤맨 아내의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이 세계에서, 익숙한 것은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른손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시선을 내리자 으스러진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차가운 철문을 미친 듯이 두드렸던 대가였다. 하지만 육체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 더 깊은 곳, 영혼이 산산조각 나버린 듯한 공허가 온몸을 잠식했다.

‘당신, 누구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경계와 혐오, 그리고 완벽한 무지. 그 눈빛 속에서 김명령은 자신의 존재가 완벽하게 지워졌음을 확인했다. 그가 알던 이지수는, 그와 사랑을 속삭이고 딸 나영을 낳았던 그 여자는, 이 평행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기억 속에만 박제된, 이제는 만질 수도 가질 수도 없는 신기루.

희망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차가운 절망이었다. 5년. 스무 살의 몸으로 돌아와 보낸 그 허송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녀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낯선 과거를 버텼다. 부모님이 남긴 막대한 유산도, 젊어진 육체도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오직 이지수, 그녀만이 이 뒤틀린 세상에서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닻이었다.

이제 그 닻이 뽑혔다.

“인형사….”

갈라진 입술 사이로 모래알 같은 단어가 굴러 나왔다. 모든 것을 앗아간 원흉. 루시퍼가 지목했던 단 하나의 이름. 아내를 되찾겠다는 목적이 부서진 지금, 남은 것은 복수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어디서부터? 막막함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터벅, 터벅.

정처 없는 걸음은 어느 낡은 놀이터 앞에서 멈췄다. 칠이 벗겨진 미끄럼틀, 녹슨 그네가 텅 빈 공간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모래밭 가장자리의 벤치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손에서 흐르던 피가 바지 위로 뚝뚝 떨어졌지만 닦아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2001년의 하늘은 유난히 파랗고 높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 * *

한편, 그가 떠나간 문 안쪽에서는 다른 종류의 혼란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지수는 현관문 잠금장치를 세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등을 기댔다. 심장이 멋대로 쿵쾅거렸다. 방금 전의 광경이 쉬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던 남자.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엔, 그 눈빛에 담긴 절박함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마치 깨지기 직전의 유리처럼 위태롭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텅 빈 슬픔이 담겨 있었다.

“뭐야, 진짜….”

그녀는 중얼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생수병을 꺼내들고 단숨에 반 병을 비웠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들끓던 속을 조금 진정시켰다.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다른 세계에서 온 남편? 죽은 딸?

터무니없는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의 손. 문을 두드리다 으스러져 피가 흐르던 그 손을 떠올리자 소름이 돋았다. 보통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저릿한 동정심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아니, 아니야. 정신 차리자, 이지수.”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세상에는 별의별 미친놈이 다 있다. 하필 그중 하나가 자기 집을 잘못 찾아왔을 뿐이다. 그렇게 결론 내리는 편이 마음 편했다. 그녀는 식탁 위에 놓인 붉은색 독촉장을 집어 들었다. ‘전기요금 미납 안내.’ 이걸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낯선 남자의 망상에 휘둘릴 여유 따윈 없었다.

몇 분 뒤, 밀린 요금을 간신히 인터넷뱅킹으로 납부한 이지수는 습관처럼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좁은 자취방의 절반을 차지하는 컴퓨터 책상. 그 앞에 앉아 전원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팬 소음과 함께 모니터가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밝혔다. 바탕화면의 화려한 판타지 일러스트가 그녀를 반겼다.

‘에텔가드 연대기 (Ethelgard Chronicle)’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현실의 도피처였다. 키보드를 두드려 게임에 접속하자, 시끄러운 현실 세계의 소음은 멀어지고 장엄한 오케스트라 풍의 배경음악이 귓가를 채웠다.

[‘지슈카’ 님이 접속했습니다.]

화면 가득 펼쳐진 가상 세계의 풍경과 길드원들의 환영 메시지가 그녀를 맞았다. 이곳에서 그녀는 무기력한 백수 이지수가 아니었다. 서버 최고의 공격대를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 ‘지슈카’였다.

그녀는 곧장 친구 목록을 열었다. 가장 위에 있는 아이디가 초록색 불을 밝히고 있었다.

‘고양이 발바닥’.

마우스를 움직여 귓속말 창을 열었다. 타자를 치는 손가락이 조금 빨라졌다.

<지슈카: 야, 발바닥. 있냐.>
<고양이 발바닥: 옹. 언니. 웬일. 이 시간에.>
<지슈카: 방금 개또라이 만남.>
<고양이 발바닥: ? 뭔 소리. 스토커?>

이지수는 잠시 망설였다. 이 기묘한 경험을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까. 하지만 ‘고양이 발바닥’은 그녀가 이 게임에서 유일하게 속내를 털어놓는 상대였다. 같은 여자였고, 나이대도 비슷했지만, 둘 사이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절대 현실에서 만나지 말 것. 연락처도 교환하지 말 것. 오직 게임 안에서만 존재하는 관계.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 편했다. 어떤 말을 해도 부담이 없었다.

<지슈카: 그런 건 아니고. 웬 남자가 찾아와서 자기가 내 남편이라는 거야. 다른 세계에서 왔다나 뭐라나.>
<고양이 발바닥: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친. 언니 집으로 들였어? 칼 맞으려고.>
<지슈카: 아니. 근데 좀 이상했어. 눈빛이… 진짜 같았다고 해야 하나. 막 울면서 내 이름 부르는데, 순간 마음 약해질 뻔.>
<지슈카: 내가 전에 킥복싱 배웠잖아. 혹시 이상한 짓 했으면 바로 거시기 찼을 거임.>
<고양이 발바닥: 그래도 그렇지! 그런 일 있었으면 나한테 겜 접속이라도 하지! 바로 길드 오빠들 소환했을 텐데!>
<지슈카: 우린 서로 연락처도 모르잖아. 알 필요도 없고.>
<고양이 발바닥: 아오, 답답! 아무튼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지슈카: 뻥이겠지. 100%. 근데 그 사람이 ‘인형사’라는 놈을 찾아야 한다고 했어. 그놈 때문에 자기 딸이 죽었다고.>

인형사.

그 단어를 타이핑하는 순간, 이지수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남자의 절규 속에 섞여 있던 그 이름. 유독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고양이 발바닥: 인형사? 뭔데 그게. 직업이 인형 만드는 사람?>
<지슈카: 나도 몰라. 그냥… 그 이름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고양이 발바닥: 흠…. 그 사람 말은 딱 봐도 사기꾼 레퍼토리인데. 근데 언니가 이렇게 신경 쓰는 거 보면 보통 또라이는 아니었나 보네.>
<고양이 발바닥: 다음부턴 진짜 조심해. 세상 흉흉하다.>
<지슈카: ㅇㅇ. 알겠음. 근데 혹시 ‘인형사’라는 거, 어디서 알아볼 데 없을까? 그냥 궁금해서.>

이지수 자신도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미친 사람의 헛소리라고 치부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아주 작은 가시 같은 것이 마음 한구석에 박혀 빠지지 않았다. 그의 눈빛. 그의 절망. 그것이 자꾸만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을 부추겼다.

귓속말 창에 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고양이 발바닥’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이윽고 몇 줄의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고양이 발바닥: 음… 인형사라…. 현실에서는 모르겠고, 게임 안이라면 혹시 모르지.>
<고양이 발바닥: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우리 서버에 존나 용한 정보상이 하나 있대.>
<지슈카: 정보상?>
<고양이 발바닥: ㅇㅇ. 유저 아이디는 아무도 모르고, 그냥 ‘그림자 상인’이라고 불린대. 이 인간이 진짜 대박인 게, 현실 정보까지 알아낸다는 거야.>

현실 정보라는 말에 이지수의 눈이 커졌다.

<지슈카: 그게 말이 됨?>
<고양이 발바닥: 나도 그냥 들은 얘기야. 예를 들어, 어떤 유저가 요즘 잘나가는 연예인 A랑 B가 사귀는지 물어봤대. 그랬더니 그림자 상인이 ‘모레 오후 3시, 압구정 C카페 앞에서 기다리면 둘이 같이 차 타고 나오는 걸 볼 수 있다’고 답해줬다는 거야. 근데 그게 진짜로 다음 주 연예 신문 1면에 터졌대. 기가 막히지 않아?>
<지슈카: …주작 아니냐.>
<고양이 발바닥: 다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 식으로 맞춘 게 한두 번이 아니래. 그래서 서버에서 거의 전설, 무슨 도깨비 감투 쓴 존재처럼 취급받아. 대신 만나는 조건이 개같이 까다롭고, 질문 한 번 하는 데 드는 비용도 어마어마하다고 함.>

이지수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불안이 아니라, 기묘한 호기심과 기대감 때문이었다.

<지슈카: 어떻게 만나는데.>
<고양이 발바닥: 그게 문제야. ‘붉은 협곡의 상단 호위’ 퀘스트, 알지? 최고 레벨대 퀘스트. 거기서 특정 조건들을 맞춰야만 랜덤으로 등장한대.>
<고양이 발바닥: 조건이 뭐냐면, 첫째. 상단에 싣는 교역품 총액이 100만 제니 이상일 것. 둘째. A루트로만 이동할 것. 셋째. 세 번째로 습격해오는 강도 무리를 혼자서 전멸시킬 것. 이 세 가지를 모두 만족하면, 그 강도 무리의 시체 더미에서 그림자 상인이 나타나서 딱 한 가지 질문에 답해준다는 거야. 완전 인터넷 괴담 같지?>

이지수는 입을 다물었다. 100만 제니. 현재 그녀의 전 재산은 장비를 맞추고 남은 3만 제니가 전부였다. 현실뿐만 아니라 게임에서도 그녀는 거지였다.

<지슈카: 시간 낭비 아니냐? 그냥 떠도는 소문일 것 같은데.>
<고양이 발바닥: 밑져야 본전이지! 언니, 그 ‘인형사’라는 거 진짜 궁금한 거 아냐? 한번 해보자!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게!>

‘고양이 발바닥’의 제안에 이지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미친 사람의 헛소리 하나 때문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시간과 돈을 쏟아붓는 게 옳은 일일까.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만약, 아주 만약에 그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이라는 의문이 싹트고 있었다.

<지슈카: 나 돈 없어. 3만 제니가 끝임.>
<고양이 발바닥: 나 30만 제니 모아둔 거 있어! 나머지는 우리 길드에 지원 요청해보자! 언니가 부탁하면 길마 오빠가 어떻게든 해줄걸!>
<지슈카: …잘 될지 모르겠다.>

망설임이 담긴 그녀의 대답에도, ‘고양이 발바닥’은 이미 행동에 나선 듯했다. 곧바로 길드 채팅 채널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길드] 고양이 발바닥: 🔥🔥🔥긴급 공지! 긴급 공지! 우리 지슈카 언니가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답니다! 붉은 협곡 상단 호위 퀘스트 지원자 급구! 100만 제니 모금도 받습니다!🔥🔥🔥

순식간에 길드 채팅창이 활성화되었다.

[길드] 칼끝에핀꽃: 웬 100만 제니? 지슈카님 사고 침?
[길드] 방패들면무적: 붉은 협곡? 거기 헬인데.
[길드] 법사마스터: 지슈카 님이 직접 나서는 퀘스트라… 이거 뭔가 큰 건수 냄새가 나는데.
[길드] 고양이 발바닥: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십시일반 제니를 모아주세요! 성공 보상은 N빵 확실하게 갑니다!
[길드] 길드마스터_카이저: 지슈카, 무슨 일이야. 귓말 줘.

길드 마스터의 등장에 이지수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자초지종을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했다. 물론 다른 세계에서 온 남편 이야기는 뺐다. 그냥 아주 중요한 정보를 가진 NPC를 만나야 하는데, 조건이 까다롭다고 둘러댔다.

‘지슈카’라는 이름의 무게는 생각보다 컸다. 그녀가 서버 최고의 공격대장으로 쌓아 올린 명성과 신뢰는 길드원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망설이던 길드원들은 길드 마스터의 보증과 ‘성공 시 보상’이라는 당근에 하나둘씩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길드] 칼끝에핀꽃: 까짓거. 지슈카 님 부탁인데. 10만 제니 보탬.
[길드] 방패들면무적: 마누라 몰래 꿍쳐둔 비상금 푼다. 20만 제니.
[길드] 법사마스터: 제 마법 연구 자금… 5만 제니만…
[길드] 길드마스터_카이저: 부족한 금액은 길드 자금으로 충당한다. 파티원은 최정예로 10명을 꾸린다. 실패는 없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100만 제니라는 거금이 모였다. 또한 서버 내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 9명이 그녀의 상단을 호위하기 위해 파티를 꾸렸다.

[길드] 고양이 발바닥: 언니! 봤지! 이게 바로 언니의 힘이야!
<지슈카: 다들 고마워서 어떡하냐. 실패하면 나 게임 접어야 할 판.>
<고양이 발바닥: 걱정 마! 우리 길드 어벤져스잖아. 자, 오빠들! A루트 집합 장소로 다들 모이세요!>

화면 속에서 각양각색의 화려한 갑옷을 입은 캐릭터들이 속속들이 붉은 협곡 입구로 모여들었다. 총인원 10명. ‘에텔가드 연대기’의 시스템상, 상단 호위 퀘스트 중에 사망하면 부활 대기 시간이 1시간이었다. 사실상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퀘스트를 시작한 당사자인 이지수는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저 짐마차 옆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다.

“파이팅!”
“가자!”
“200만 제니 벌어보자고!”

파티원들의 활기찬 채팅이 오가는 가운데, 거대한 짐마차가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100만 제니를 실은 상단이 성공적으로 목적지에 도착하면 보상은 2000만 제니. 10명이 나눠도 1인당 200만 제니라는 어마어마한 거금이었다. 간만에 찾아온 큰 건수에 모두의 얼굴에는 흥분과 긴장이 교차했다.

붉은 협곡은 그 이름처럼 온통 붉은색의 바위와 흙으로 이루어진 삭막한 땅이었다. 황량한 바람 소리만이 귓가를 스쳤다.

출발한 지 10분쯤 지났을까. 길 양옆의 바위 뒤에서 수십 명의 도적 떼가 함성을 지르며 나타났다.

“첫 컨택이다! 다들 긴장해!”

파티의 리더 역할을 맡은 길드 마스터 카이저가 외쳤다.

“탱커는 전방! 딜러는 좌우로 산개! 힐러는 중앙에서 지원!”

일사불란한 명령에 따라 파티원들이 진형을 갖췄다. 최정예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그들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지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전투를 지켜봤다. 화면 가득 화려한 스킬 이펙트가 터져 나왔다. 검과 방패가 부딪히는 쇳소리, 마법이 작렬하는 폭음, 도적들의 비명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생생하게 흘러나왔다.

첫 번째 전투는 사망자 없이 가볍게 끝났다. 파티원들은 가볍게 승리를 자축하며 전리품을 챙겼다.

“이 정도면 껌이네!”
“역시 우리 길드가 최고야.”

하지만 그들의 자신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두 번째 습격은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훨씬 더 교활하고 강력한 정예 도적들이었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악! 힐! 힐 좀!”
“마나가 없어요!”
“탱커 둘 다운! 진형 무너진다!”

아수라장이었다. 이지수의 눈앞에서 파티원들의 체력 바가 붉은색으로 점멸하다가 회색으로 변하는 광경이 속출했다. 순식간에 4명이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남은 인원은 길드 마스터를 포함한 6명뿐. 그들 역시 만신창이였다.

“젠장… 앞으로 두 번이나 더 남았는데, 이대로는 무리겠어요.”

파티의 메인 딜러인 ‘칼끝에핀꽃’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캐릭터는 갑옷 곳곳이 부서지고 체력이 10%도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길마님, 아쉽지만 재정비해서 다시 오죠. 포기합시다.”

힐러인 ‘고양이 발바닥’도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퀘스트를 포기하면 투자한 100만 제니의 절반인 50만 제니는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진행하다 전멸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포기해! 못 먹어도 고!”

‘방패들면무적’이 반박하며 의견이 갈렸다. 파티 채팅창은 순식간에 격론의 장으로 변했다. 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자 이지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구경꾼일 뿐이었다. 무력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때, 그녀는 결심했다.

<지슈카: 계속 가요.>

그녀의 메시지가 채팅창에 뜨자 소란스럽던 대화가 순간 멎었다.

<지슈카: 성공하면 제 몫은 다 여러분께 나눠 드릴게요. 한 번만 더 부탁드려요, 모두.>

그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그리고 유일한 제안이었다. 그 말에 파티원들의 눈빛이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200만 제니에서 0원이 될 위기였지만, 성공한다면 1인당 돌아가는 몫이 220만 제니를 훌쩍 넘게 된다. 리스크와 리턴이 동시에 극대화되는 순간이었다.

침묵을 깬 것은 길드 마스터 카이저였다.

[길드] 길드마스터_카이저: 아니야, 지슈카. 네 몫을 나눠줄 필요는 없어. 이건 우리 모두의 퀘스트다.
[길드] 길드마스터_카이저: 여러분, 계속 진행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반대하는 분은 여기서 빠지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끝까지 갑니다.

그의 단호한 선언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의를 불태우는 듯했다.

“여기까지 와서 누가 포기하겠어요. 갑시다!”
“죽더라도 같이 죽는 거지!”

파티는 다시 정비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전보다 훨씬 더 신중하고 비장한 분위기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협곡의 가장 좁은 길목에 다다랐을 때, 마침내 시스템 메시지가 화면 중앙에 떠올랐다.

[세 번째 적의 습격이 시작됩니다.]
[특수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파티원들이 긴장하며 주위를 경계하는 순간, 저 멀리 바위 위에서 홀연히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검은 로브를 깊게 눌러써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손에는 칠흑 같은 단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다른 도적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 한 명뿐이었다.

“아니, 저건 뭐야? 저런 NPC가 있었어?”

사전에 정보가 없던 파티 멤버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수와 ‘고양이 발바닥’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소문이 진짜였다.

‘그림자 상인.’

그가 나타난 것이다.

“전원 방어 진형! 상단 물품을 우선적으로 방어하라!”

카이저가 소리침과 동시에 공격조 3인이 먼저 뛰쳐나갔다. 원래 5인 파티였지만 두 명이 사망하여 전력이 반감된 상태. 하지만 남은 셋은 길드 내에서도 최상급 실력자들이었다. 쌍검사, 도적, 쉴더로 구성된 그들의 연계 공격은 완벽에 가까웠다.

쌍검사가 그림자 상인의 목과 허리를 동시에 노리며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림자 상인은 마치 공격 궤도를 미리 읽고 있었다는 듯, 잔상만을 남기며 2미터 옆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뭐야? 저런 이동 스킬이 있어?”

쉴더가 경악하며 외쳤다. 그 순간, 그림자 상인은 어느새 쌍검사의 등 뒤에 나타나 있었다. 비명조차 지를 틈이 없었다. 검은 단검이 번개처럼 그의 목을 그었고, 쌍검사는 그대로 회색빛으로 변하며 쓰러졌다.

한 방이었다.

모두가 그 압도적인 속도에 반응조차 하지 못한 사이, 그림자 상인은 이미 다음 목표인 도적의 가슴에 단검을 꽂아 넣고 있었다.

“읔…!”

도적마저 쓰러지자, 카이저가 절박하게 외쳤다.

“전원 공격! 뭉치면 죽는다! 산개해서 공격해!”

남은 파티원들이 일제히 그림자 상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필사적인 공격은 검은 로브에 닿지도 못했다. 그림자 상인은 마치 춤을 추듯 모든 공격을 흘려내며 한 명씩, 차례차례 쓰러뜨렸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순식간에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길드 마스터 카이저와 힐러인 ‘고양이 발바닥’뿐이었다.

“큭… 뭐가 저리 세!”

카이저가 회심의 필살기를 사용했지만, 그림자 상인은 가볍게 피하며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카이저마저 쓰러지고, 이제 남은 것은 비전투 직업인 ‘고양이 발바닥’뿐이었다. 그녀 역시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전멸.

이지수는 텅 빈 눈으로 자신을 제외한 모든 파티원의 아이디가 회색으로 변한 것을 바라보았다. 실패였다. 허탈함이 온몸을 덮쳤다. 길드원들에게 미안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홀로 서 있던 그림자 상인이 천천히 그녀가 있는 짐마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스템의 귓속말이 아닌, 바로 눈앞에 채팅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치 NPC가 말을 거는 것처럼.

[그림자 상인: 이지수. 맞나?]

자신의 현실 이름이 불리는 순간, 이지수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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