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 집행》 10화. 열두 번째 호랑이
태양이 정수리에 박혔다. 그림자는 발밑으로 스며들어 제 몸 하나 가릴 곳 없었다. 훈련장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지열이 아지랑이처럼 시야를 흐렸다. 셔츠는 이미 땀으로 젖어 맨살에 찰싹 달라붙었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턱 끝에 맺혔다가 흙바닥으로 툭, 툭 떨어졌다.
나는 숨을 골랐다. 폐부가 터질 듯이 뜨거웠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특히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왔다. 백호검법 이성(二星)의 열 번째 초식, 맹호단좌(猛虎斷坐). 앉은 호랑이가 허리를 끊어내는 형상의 이 초식은 하체를 땅에 뿌리박은 채 상체와 허리 힘만으로 검을 비틀어 내지르는, 지극히 기형적인 움직임을 요구했다.
전생에서 이 초식 하나를 몸에 익히는 데 꼬박 석 달이 걸렸다. 기초 체력이 부족한 열세 살의 몸으로는 버텨내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알고 있었다. 어디에 힘을 주고, 어느 근육을 이완시켜야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지. 회귀가 내게서 모든 내공을 앗아갔지만, 몸을 쓰는 법에 대한 기억만큼은 뼈저리게 새겨 놓았다.
나는 다시 목검을 고쳐 잡았다. 손바닥에 잡힌 굳은살이 쓰라렸다. 어제 생긴 물집이 터지고 아물기를 반복한 자리였다.
“흐읍!”
짧은 기합과 함께 다시 몸을 낮췄다. 왼발을 반 보 앞으로 내딛고, 오른 무릎을 거의 땅에 닿을 듯 말 듯 한 높이로 구부린다. 상체는 꼿꼿이 세운 채, 허리를 비틀어 목검을 오른쪽 어깨 뒤로 넘겼다가, 용수철이 튕겨나가듯 폭발적으로 정면을 향해 내질렀다.
콰아악.
목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제법 날카로웠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허리가 미세하게 무너졌다. 하체가 버텨주지 못한 탓이다.
“젠장.”
나직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몸이 기억하는 감각과 실제 몸이 내는 결과물 사이의 괴리. 그것이 이번 생에서 내가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벽이었다. 사부, 한천악이 남기고 간 침묵의 무게가 등 뒤에 여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검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그의 질문은 단순한 물음이 아니었다. 내 속을 들여다보려는 칼날이었고,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가늠하려는 저울추였다.
모범적인 대답으로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했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는 한천악이다. 수십, 수백 번의 생을 거치며 나를 관찰하고, 내 성장의 모든 경로를 꿰뚫어 보고 그것을 부숴버린 자. 나의 이 비정상적인 성장 속도를 그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는 다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내가 어떤 그릇으로 자라나는지, 이번 생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배신할 것인지.
그래서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지쳐 쓰러지더라도, 근육이 파열되더라도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다. 그가 나의 성장을 ‘기특한 재능’의 범주로 여기는 동안, 나는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괴물이 되어야 했다.
다시 맹호단좌의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는 허리에 실리는 힘을 십 분의 일쯤 덜어내고, 대신 발바닥 전체로 땅을 움켜쥐는 감각에 집중했다. 흙과 내 발이 하나가 되는 느낌. 뿌리가 단단해야 줄기가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수십 번을 더 반복했다. 해가 서쪽으로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고,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질 때까지. 마침내 목검을 내지르는 순간 허리가 무너지지 않고 버텨내는 완벽한 자세가 나왔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땀으로 목욕을 한 듯했다.
“어이, 진소운!”
그때였다. 훈련장 입구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머리를 양 갈래로 단정하게 묶고, 활동하기 편한 무복 차림을 한 소녀. 유연(柳燕)이었다. 그녀의 등에는 신장만 한 장궁이 비스듬히 메여 있었다.
전생의 정인.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나를 그저 같은 문파의 어린 사제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녀의 해맑은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이번 생에서는 결코 그녀를 잃지 않으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더 강해져야 했다.
“꼴이 말이 아니네. 그러다 사람 잡겠다.”
유연이 성큼성큼 다가와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녀의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녀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물통을 풀어 내게 건넸다.
“마셔. 이러다 탈진하겠어.”
나는 말없이 물통을 받아 들었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타는 듯한 갈증이 비로소 가시는 것 같았다.
“고맙다, 유연 사저.”
“고맙긴. 근데 너 요새 좀 이상해.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단 말이야. 무슨 일 있어?”
유연의 눈이 나를 샅샅이 뜯어봤다.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다. 그냥… 수련에 좀 더 집중하고 싶어졌을 뿐이다.”
“집중도 좋지만, 뭐든 과하면 독이야. 너 지금 네 얼굴이 얼마나 창백한지 알아? 꼭 송장 같다고.”
송장이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이미 한 번 죽어 송장이 되었던 몸이니까. 나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해줘서 고맙다. 하지만 괜찮아.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그걸 어떻게 믿어. 넌 원래부터 제 몸 아낄 줄 모르는 녀석이었잖아.”
유연이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내 옆에 놓인 목검을 발끝으로 툭 쳤다.
“백호검법 이성? 벌써 거기까지 나갔어? 대단하네. 하지만 검술은 힘으로만 하는 게 아니야. 쉼과 흐름을 알아야지. 그렇게 무식하게 몸만 혹사시키면 경맥이 상할 수도 있어.”
그녀의 말은 정확했다. 실제로 나는 며칠 전 억지로 운기조식을 하다 토혈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정석대로 천천히 나아갈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조언은 고맙지만, 나만의 방식이 있다.”
내 단호한 대답에 유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너, 정말 이상해졌구나. 예전엔 안 그랬잖아.”
“사람은 변하는 법이다.”
싸늘한 대답이었다. 유연은 잠시 나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서운함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뒤섞여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안에 도사린 이질적인 무언가를.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하지만 정말 힘들면 꼭 얘기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그 말을 남기고 유연은 돌아섰다. 그녀가 훈련장을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와 거리를 두어야 했다. 내 복수의 길에 그녀를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그녀의 삶은, 그녀의 시간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어야 했다. 전생처럼 내 욕심 때문에 망가져서는 안 되었다.
물통에 남은 물을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휴식은 끝났다. 유연의 충고가 귓가에 맴돌았지만, 나는 다시 목검을 집어 들었다. 맹호단좌는 이제 몸에 익었다. 다음은 이성의 마지막 두 초식, 열한 번째 초식 ‘호보쌍영(虎步雙影)’과 열두 번째 초식 ‘맹호박토(猛虎搏兎)’였다.
호보쌍영은 이름 그대로 호랑이의 걸음처럼 움직이며 두 개의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보법 중심의 초식이다. 상대의 눈을 속이는 환영보(幻影步)와도 맥이 닿아 있지만, 백호검법의 호보쌍영은 단순히 눈을 속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두 개의 그림자 중 어느 쪽이 실체인지, 어느 쪽에서 공격이 들어올지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극악한 심리전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나는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첫 발을 내디뎠다. 왼발을 축으로 삼아 몸을 반 바퀴 회전시키며 오른발을 옆으로 길게 뻗는다. 동시에 허리를 숙여 무게 중심을 최대한 낮춘다. 이 과정에서 상체와 하체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어야만 했다.
역시나,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첫 시도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다 넘어지는 것으로 끝났다. 열세 살의 하체 근력과 관절의 유연성으로는 어림도 없는 움직임이었다.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또 시도했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다시 발을 내디뎠다. 수십 번을 반복하는 동안 무릎과 팔꿈치가 흙바닥에 쓸려 상처가 났다.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보다 더 선명한 것은 초식을 완성해야 한다는 집념이었다.
전생의 나는 이 보법을 익히기 위해 사형들의 움직임을 몇 달이고 눈으로만 좇았다. 그들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 밟아보고, 그들의 호흡을 흉내 내며 어설프게 따라 하던 기억이 생생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 머릿속에는 완벽한 완성본이 들어 있었다. 문제는 이 미숙한 육신을 어떻게 완성본에 가깝게 조립해 내느냐였다.
‘핵심은 허리가 아니라 발목이다.’
문득 깨달음이 스쳤다. 전생의 사부도, 마진 사형도 알려주지 않았던 부분. 오직 수많은 실전과 죽음의 위기를 넘나들며 스스로 깨우쳤던 감각이었다. 호보쌍영의 중심축은 허리가 아니다. 땅을 딛고 박차는 발목의 탄력, 그리고 그 탄력을 순간적으로 반대쪽 발로 옮기는 전환의 기술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나는 의식을 발목에 집중했다. 발을 내디딜 때 발뒤꿈치가 아니라 발가락 끝으로 땅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몸을 회전시키는 순간, 박차고 나가는 발의 발목을 꺾어 추진력을 더했다.
몸이 순간적으로 공중에 뜨는 듯한 감각.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원래 서 있던 자리에서 세 걸음이나 떨어진 곳에 착지해 있었다. 완벽한 성공은 아니었지만, 분명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이었다. 몸이 두 개로 나뉘는 듯한 잔상이 언뜻 시야에 비쳤다.
“됐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가능했다. 이 몸으로도 해낼 수 있었다.
나는 그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수백 번이고 호보쌍영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어설펐던 움직임이 점차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졌다. 열 번에 한 번 성공하던 것이 다섯 번에 한 번, 그리고 마침내 세 번에 두 번꼴로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 너머로 자취를 감출 무렵, 나는 마침내 호보쌍영의 뼈대를 완성했다.
이제 마지막, 열두 번째 초식 맹호박토만이 남았다.
맹호박토는 사나운 호랑이가 토끼를 낚아채는 형상을 본뜬, 백호검법 이성의 마지막 초식이자 가장 강력한 살수(殺手)였다. 호보쌍영의 현란한 움직임으로 상대의 혼을 빼놓은 뒤, 예측 불가능한 각도에서 일격에 급소를 꿰뚫는 필살기. 이 초식의 핵심은 속도와 정확성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응축된 힘의 폭발이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호보쌍영으로 몸을 날려 허공에 두 개의 잔상을 남기는 동시에, 착지하는 발에 온 체중을 실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목표를 향해 목검을 내리꽂는다.
이론은 완벽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공중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 몸이 그대로 흙바닥에 처박혔다. 어깨부터 떨어지는 바람에 숨이 턱 막혔다.
“크헉…!”
한참을 엎드려 기침을 쏟아냈다. 어깨 관절이 빠진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전생에 한천악의 검에 심장이 꿰뚫리던 고통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보법은 완벽했다. 도약도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공중에서의 자세 제어였다.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 허공에 뜬 몸을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방법을 바꿔야 했다. 내공이 없다면, 다른 것을 이용해야 한다.
‘회전력.’
그래, 회전력이다.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순간, 허리를 더 강하게 비틀어 몸 전체에 회전력을 더하는 것이다. 팽이가 스스로 균형을 잡고 서 있듯이, 고속으로 회전하는 몸은 축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나는 다시 도전했다. 이번에는 도약과 동시에 허리를 있는 힘껏 비틀었다. 몸이 마치 거대한 회오리처럼 휘감기며 공중으로 솟구쳤다. 시야가 핑 돌았지만, 놀랍게도 몸의 축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거다!
나는 목표로 삼았던 훈련장의 낡은 허수아비를 향해 목검을 내리꽂았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목검이 허수아비의 가슴팍에 깊숙이 박혔다. 짚단이 터져 나가며 사방으로 흩날렸다. 완벽한 일격이었다. 나는 착지와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듯했다. 하지만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해냈다. 하루 만에, 단 하루 만에 백호검법 이성의 마지막 두 초식을 완성해 낸 것이다. 전생에서는 꼬박 반년이 넘게 걸렸던 일이었다.
“……!”
그때였다. 훈련장 입구 쪽에서 나직한 탄식이 들려온 것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두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대사형 마진, 그리고 그 옆에서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는 이사형 조경이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것일까. 마진 사형의 얼굴에는 경악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는 몇 번이고 입을 달싹였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듯했다. 열세 살짜리 사제가, 문파에 입문한 지 고작 몇 년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백호검법 이성을 완벽하게 시연해 내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한 충격이 얼마나 클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조경 사형의 반응은 달랐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보다는 차가운 분석의 빛이 감돌았다. 그는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진귀한 물건을 감정하듯 샅샅이 뜯어보고 있었다. 그 눈빛 속에 담긴 것은 순수한 감탄이 아니었다. 시기, 질투, 그리고 기이한 소유욕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전생에 그가 나를 배신했던 이유의 편린을 보는 것 같아 등골이 서늘해졌다.
“소운아.”
마침내 입을 연 것은 마진 사형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쾌활함은 온데간데없이 잔뜩 잠겨 있었다.
“방금 그건… 백호검법 이성의 마지막 초식, 맹호박토가 아니더냐?”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예, 대사형. 맞습니다.”
내 대답에 마진 사형은 할 말을 잃은 듯 허, 하고 짧은 숨을 뱉었다. 그는 조경 사형을 한 번 돌아보고는 다시 나를 보며 물었다.
“언제… 언제부터 이성을 익힌 것이냐. 아니, 그보다… 누가 너에게 가르쳐 준 것이지? 사부님께서?”
“아닙니다. 어깨너머로 사형들께서 수련하시는 모습을 보고 혼자 익혔습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회귀의 비밀을 감춘 채 나의 이 비정상적인 성장을 설명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천재성’.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경지를 마주하면 으레 그런 편리한 단어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곤 했다.
내 대답을 들은 마진 사형의 눈이 더욱 커졌다. 어깨너머로 보고 익혔다고? 그것도 백호검법 이성 전체를? 그는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인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결과물이 그 모든 상식을 압도하고 있었다.
“하늘이 내린 재능이로구나. 우리 백호문에 진정한 기재가 태어났어.”
마진 사형이 감격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조금의 의심도, 시기심도 없었다. 오직 순수한 기쁨과 자랑스러움만이 가득했다. 전생에도 그는 늘 그랬다. 나를 친동생처럼 아끼고, 나의 성장을 누구보다 기뻐해 주었던 사람. 그런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떠올리자 가슴이 아파왔다.
“과찬이십니다, 사형.”
나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조경 사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잘 보았다, 소운아.”
그의 목소리는 기름을 친 듯 매끄러웠지만, 어딘가 서늘한 구석이 있었다.
“네 재능이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구나.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구나.”
그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 손길이 뱀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불쾌했다. 하지만 나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맑게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이사형. 앞으로도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지. 언제든 어려운 것이 있으면 나를 찾아오너라.”
조경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는 마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자, 그만 가보세. 어린 사제가 수련을 마치고 쉬어야지. 우리가 너무 방해한 것 같군.”
마진은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얼굴로 내게 몇 번이고 등을 두드려주고 나서야 조경을 따라 훈련장을 나섰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마진 사형의 순수한 감탄과 조경 사형의 뒤틀린 관심. 그 두 개의 시선이 교차하며 내 주위에 보이지 않는 그물을 짜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문파의 평범한 막내 사제가 아니었다. 경계와 견제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해가 완전히 졌다. 훈련장에는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땅거미가 짙게 깔리고, 하늘에는 하나둘 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지만, 정신은 오히려 더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목검을 주워 들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백호검법 일성 일초식부터 이성 십이초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물 흐르듯 연무를 펼쳤다.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열세 살의 육신이 마침내 전생의 기억과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지막 초식을 끝내고 숨을 고르는데, 등 뒤에서 싸늘한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존재.
한천악이었다.
그는 소리 하나 없이 내 등 뒤 세 걸음 거리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것일까. 내가 연무를 시작할 때부터? 아니면 그 이전부터? 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식은땀이 흘렀다.
“사부님.”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수련이 끝났느냐.”
그의 목소리는 고요한 호수 같았다.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아 오히려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예, 사부님.”
“일어나거라.”
나는 허리를 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자상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깊고 어두운 심연 같은 그의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가 들고 있던 목검을 가져갔다. 그는 목검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날과 손잡이를 꼼꼼히 살폈다. 마치 장인이 잘 벼려진 칼을 감정하듯이.
“하루 만에 이성의 마지막까지 이르렀더구나.”
담담한 어조였다. 칭찬도, 질책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확인하는 듯한 말투.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
한천악이 피식 웃었다.
“무도의 길에 운이란 없다. 오직 땀과 시간만이 있을 뿐이지. 너는 그 두 가지를 모두 뛰어넘었다. 어찌 된 영문이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올 것이 왔다. 그는 나의 성장을 더 이상 ‘재능’이라는 말로 덮어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의 질문은 낮에 던졌던 선문답과는 차원이 다른, 진실을 요구하는 칼날이었다.
나는 숨을 골랐다. 여기서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의심을 사는 순간, 이번 생 역시 전생의 비참한 결말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송구하오나, 사부님. 제자 역시 어찌 된 영문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나는 최대한 어리고 순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저… 사부님께서 가르쳐주신 풍운심법의 구결을 외우고, 사형들의 검무를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 대답에 한천악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가 던진 이 말은 양날의 검이었다. 회귀를 암시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동시에 타고난 천재성을 의미하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숨이 막혀왔다. 시간마저 멈춘 듯한 압박감.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릇이 넘치면 깨지는 법이다.”
그는 내 손에 목검을 다시 쥐여주었다.
“너의 그릇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작고 연약하다. 너무 서두르지 마라. 내일 아침부터는 검을 잡지 말고, 운기조식에만 전념하도록 해라. 한 달 동안.”
“……예?”
“한 달이다. 그때까지 검을 잡는 모습을 보인다면, 네 손목 힘줄을 내가 직접 끊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한 점의 농담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것은 명령이자, 경고였다.
나의 비정상적인 성장에 대한 그의 답은 ‘봉쇄’였다. 내가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족쇄를 채우겠다는 뜻이다. 그는 나의 재능을 칭찬하지도, 키워주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가 정해놓은 속도에 맞추도록 강제할 뿐이었다.
전생과 똑같았다. 내가 무언가 뛰어난 성취를 보일 때마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나를 억눌렀다. 그때는 그것이 제자를 아끼는 사부의 깊은 뜻이라 믿었지만, 지금은 안다. 이것은 사육이다. 내 그릇이 그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억지로 눌러 담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나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나의 순종적인 태도에 만족한 듯, 그는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전생의 마지막 순간, 내 심장을 꿰뚫었던 그 손이다. 그 서늘한 감촉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지만,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쉬거라.”
그 말을 남기고 한천악은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에 들린 목검이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한 달간의 수련 금지. 그것은 내 계획에 커다란 차질을 의미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회이기도 했다.
검을 잡지 못한다면, 내실을 다지면 된다. 그의 눈을 피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나의 진짜 힘을 키울 시간. 그는 나를 새장에 가두려 하지만, 나는 그 새장 안에서 날개를 단련할 것이다.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별들처럼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복수의 길. 하지만 나는 가야만 했다. 설령 그 끝에 또 다른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나는 목검을 훈련장 구석 무기 거치대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내 방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지쳐 무거웠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단단했다. 내일 아침부터 시작될 새로운 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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