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 집행》 9화. 침묵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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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D 편집실
《천도 집행》  · 

사부 처소에서 새어 나오는 등불 빛이 망막에 점점이 박혔다. 나는 그 빛을 등지고 내 방으로 향했다. 초저녁 공기는 서늘했고, 낮 훈련으로 달아올랐던 살갗을 부드럽게 식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흙길을 밟는 내 발소리만이 고요한 문중의 밤에 울렸다.

방금 전까지 수련장에 가득했던 열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성(二成)의 아홉 초식. 전생이었다면 꼬박 반년을 쏟아부어야 했을 경지다. 그 뼈대를 단 사흘 만에 세웠다. 비정상적인 속도. 그러나 내 마음은 기쁨보다 묵직한 돌덩이를 얹은 듯 가라앉아 있었다.

사부가 내 손목을 잡았을 때의 감촉. 체온이라곤 느껴지지 않던 그 서늘함. 그것은 십삼 년 뒤, 내 가슴을 꿰뚫었던 검날의 냉기와 정확히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기억은 독처럼 온몸에 퍼져나갔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피 냄새 대신 맑은 밤공기가 폐부를 채웠다. 아직은 괜찮다. 아직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았다. 촛불 하나만 켠 채 자리에 앉았다. 벽에 비친 내 그림자가 거인처럼 일렁였다. 열세 살 소년의 왜소한 어깨와 앙상한 팔다리. 그 안에 갇힌 스물여섯의 망령. 나는 눈을 감고 조용히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풍운심법의 구결을 따르되, 진기의 흐름은 백호심법의 경로를 은밀히 덧대었다. 아직 단전에 모인 내공이라 할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갓 피어난 실낱같은 기운. 나는 그 미약한 기운을 다그치지 않았다. 그저 오늘 익힌 백호검법 이성의 아홉 초식의 경로를 따라 천천히 몸 안을 유영하게 할 뿐이었다.

어깨에서 팔꿈치로, 다시 손목으로. 허리를 비틀고 무릎을 굽혔다 펴는 동작의 흐름을 진기가 따라 흘렀다. 근육의 미세한 떨림과 뼈마디의 뻐근함이 느껴졌다.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열세 살의 육체는 스물여섯의 기억이 요구하는 움직임을 감당하기 버거워했다. 낮의 토혈은 그 경고였다.

‘그릇이 먼저다.’

전생에서는 이 간단한 이치를 깨닫는 데 십 년이 걸렸다. 온갖 영약과 비급에 눈이 멀어 몸을 망가뜨렸다. 사부는 그런 나를 보며 늘 안타까운 듯 미소 지었다. 그 미소 아래 칼날이 숨겨져 있음을 알았을 때,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잃은 뒤였다.

이번 생에서는 다르다. 조급함은 금물이다.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은, 가장 정직한 길이다. 나는 호흡을 더욱 깊고 길게 가져갔다. 실낱같던 진기가 조금씩 온기를 띠며 경맥을 덥혔다. 사흘간의 무리한 수련으로 쌓인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촛불이 하염없이 타들어 가는 동안, 나는 텅 빈 단전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오직 몸을 다스리는 데만 집중했다.

* * *

다음 날, 동이 트기도 전에 나는 다시 수련장에 섰다. 새벽 냉기가 코끝을 쨍하게 파고들었다. 손에 쥔 목검의 감촉이 차가웠다. 나는 가볍게 몸을 푼 뒤, 어제 완성한 이성 아홉 번째 초식까지를 물 흐르듯 연무했다.

호보(虎步)의 위엄, 호조(虎爪)의 날카로움, 호미(虎尾)의 유연함. 아홉 가지 변화가 하나의 초식처럼 이어졌다. 아직 내공이 실리지 않아 위력은 없었지만, 초식의 뼈대만큼은 전생의 그 어떤 때보다도 견고했다.

그리고 나는 열 번째 초식, 맹호단좌(猛虎斷坐)의 자세를 취했다.

백호검법 이성의 마지막 세 초식은 이전 아홉 초식과 결이 달랐다. 앞선 초식들이 호랑이의 움직임을 본떴다면, 마지막 세 초식은 호랑이의 ‘기세’를 담는 그릇이었다. 그중에서도 맹호단좌는 허공에 몸을 띄웠다가 허리와 무릎의 힘만으로 자세를 제어하며 검을 내리찍는 고난도의 초식이었다.

전생에서 이 초식을 익히다 발목이 부러졌던 기억이 선명했다.

나는 숨을 고르고 땅을 박찼다. 몸이 허공으로 솟았다. 열세 살의 몸으로는 높이 뛸 수 없었다. 고작 삼 척(尺) 남짓. 하지만 중요한 건 높이가 아니었다. 공중에서 허리를 비틀어 검을 쥔 팔에 무게를 싣고, 착지와 동시에 검을 내리찍는 일련의 동작을 한 호흡 안에 끝내야 했다.

그러나 몸이 기억을 따라가지 못했다.

“큭!”

착지하는 순간, 발목이 꺾이며 균형을 잃었다. 나는 그대로 옆으로 굴러 넘어졌다. 흙바닥에 어깨를 세게 부딪쳤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퍼졌지만, 나는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즉시 일어섰다.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두 번째 시도. 이번에는 허리를 비트는 각이 너무 컸다. 착지는 성공했지만, 검 끝이 엉뚱한 방향을 향했다.

세 번째. 네 번째. 열 번이 넘는 시도가 이어졌다. 넘어지고, 비틀거리고, 검을 놓치기까지 했다. 새벽 수련을 나온 다른 제자들이 하나둘 수련장 구석에 모여들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 녀석이 미쳤나, 하는 눈빛들이었다.

“소운아.”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대사형 마진이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내 어깨를 짚었다.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 이성 아홉 초식까지 익힌 것도 대단한데, 맹호단좌는….”

마진 사형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열다섯 살에 이성을 익힌 그 역시 맹호단좌를 완벽히 구사하기까지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열세 살의 내가 이 초식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그의 상식 밖의 일이었다.

“괜찮습니다, 사형. 몸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고집은….”

마진 사형이 혀를 차며 물러섰다. 하지만 그는 자리를 뜨지 않고, 멀찍이 서서 내 수련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는 순수한 염려와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그때, 수련장 입구에 또 다른 인영이 나타났다. 이사형 조경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마진 사형과 달랐다. 놀라움보다는 무언가를 가늠하고 재는 듯한 서늘함이 있었다. 마치 상인이 상품의 가치를 매기는 듯한 눈빛.

나는 두 사형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맹호단좌를 시도했다.

‘문제는 근력이 아니야. 무게 중심의 이동이다.’

전생의 스승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맹호단좌는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열세 살의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의 나는 안다. 공중에서 몸을 비트는 순간,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이어지는 축을 얼마나 곧게 유지하느냐가 관건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전생의 감각을 되살렸다. 화경의 고수가 펼쳤던 맹호단좌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렸다. 그의 몸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린 듯, 공중에서도 땅에 뿌리박은 것처럼 안정적이었다.

다시 땅을 박찼다. 이번에는 높이 뛰려는 욕심을 버렸다. 오직 축을 유지하는 데만 집중했다. 허리를 비트는 대신, 단전에 의식을 모아 몸의 중심을 잡았다. 착지. 발목이 살짝 흔들렸지만, 이번에는 버텨냈다. 검 끝이 땅에 닿기 직전 멈췄다.

“오…!”

마진 사형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성공은 아니었지만, 길을 찾았다.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스무 번, 서른 번의 시도를 더 반복했다. 넘어지는 횟수가 줄어들고, 착지 자세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검 끝의 흔들림도 점차 잦아들었다.

아침 해가 백호산 능선 위로 완전히 솟아올랐을 때였다.

퍼석.

내 목검 끝이 정확하게 땅바닥의 작은 돌멩이를 둘로 쪼갰다. 완벽한 맹호단좌였다. 비록 내공은 실리지 않았지만, 자세와 흐름만큼은 흠잡을 데 없었다.

수련장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마진 사형은 입을 벌린 채 굳어 있었고, 다른 제자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조경 사형의 눈빛만이 더욱 깊고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잘 크는구나, 정말로.”

조경 사형이 나지막이 읊조리듯 말했다. 그는 칭찬이라고 하기엔 어딘지 모르게 서늘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몸을 돌려 수련장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경계심을 다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수련장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제자들의 웅성거림도,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압도적인 존재감 하나가 공간 전체를 짓눌렀다.

사부, 한천악이었다.

그는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수련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평소와 같은 단정한 도복 차림에 온화한 미소를 띤 얼굴. 하지만 그가 내 앞에 서자, 아침 햇살마저 빛을 잃고 주변 풍경이 흑백으로 변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제자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고, 마진 사형조차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목검을 든 채 그를 마주 보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방금 성공한 맹호단좌를 보았을까. 아니면 그 이전의 처참한 실패들을 모두 지켜본 것일까. 그의 침묵은 그 어떤 질책보다도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한천악은 아무 말 없이 내게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에는 소리가 없었다. 마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는 내 앞에 멈춰 서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전생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내 위로 드리워졌던 그의 그림자. “아직 멀었구나, 소운아.”라며 나직이 속삭이던 목소리. 그리고 내 단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던 검날의 끔찍한 감각.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 기억들을 억지로 짓눌렀다. 지금 나는 열세 살의 진소운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재능 있는 어린 제자.

“…….”

사부의 침묵이 길어졌다. 그는 나를 보는 것인지, 내 안의 다른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은 영원처럼 느껴졌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지극히 평온했다.

“소운아.”

“예, 사부님.”

“검(劍)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질문은 검법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나의 진척이나 재능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너무나도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물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시험이다. 내 안의 칼날을 감추고 있는지, 그 칼끝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 떠보는 함정이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스물여섯의 편린을 드러내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이다. 복수는커녕, 내일의 해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일부러 조금 망설이는, 어린 제자의 모습을 연기했다. 그리고 최대한 순수한 눈빛으로 사부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검은… 백성을 지키고, 문파를 수호하는 협의(俠義)의 도구라 배웠습니다.”

가장 정석적이고, 가장 모범적인 대답. 백호문의 모든 제자가 똑같이 배운, 조금의 개성도 없는 답변이었다. 내 대답을 들은 한천악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만족인지, 실망인지, 혹은 그저 무감각한 관찰의 일부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 아래 내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는 온화했지만, 그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계속하거라.”

그는 그 말만 남기고 몸을 돌렸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사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멈췄던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자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마진 사형이 다가와 땀으로 축축한 내 등을 툭 쳤다.

“정말이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사부님께서 널 어찌나 뚫어져라 보시던지.”

그는 순수한 감탄과 안도를 표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방금 전의 짧은 대화는 목에 칼이 들어왔다 나간 것과 같았다. 온몸의 진기가 빠져나간 듯한 탈력감이 몰려왔다.

나는 목검을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육체의 피로 때문이 아니었다. 한천악이라는 거대한 심연을 마주한 정신의 피로였다.

통과한 것일까. 아니면, 의심의 씨앗을 심은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의 감시망 안에서,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강해지는 것. 그의 침묵이 의심이 아닌 경탄으로 바뀌고, 그 경탄이 방심이 되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

나는 다시 맹호단좌의 자세를 취했다. 방금 전보다 몸이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검 끝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사부의 침묵이 남기고 간 무게가, 역설적으로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나는 홀로 수련장에 남아 열 번째 초식을 수백 번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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