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 집행》 11화. 차가운 불씨, 따뜻한 바람
촛불 심지가 꼿꼿이 타올랐다. 흔들림 없는 불꽃은 방 안의 공기가 지독할 만큼 고요하다는 증거였다. 나는 불꽃을 바라보며 사부가 남긴 명령을 곱씹었다. 한 달간 검 수련 금지. 단순한 제재가 아니었다. 급격한 성장에 대한 견제이자, 나의 반응을 살피려는 시험이었다.
전생이었다면 절망하고 분노했을 것이다. 열세 살의 치기 어린 마음으로는 사부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억울함에 밤을 새웠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달랐다. 수십 년의 세월과 한 번의 죽음을 겪은 내 영혼은 그 명령 속에 숨겨진 칼날과 기회를 동시에 읽어냈다.
한천악. 그는 나의 성장이 예상을 뛰어넘자 고삐를 죄기로 한 것이다. 백호검법 초식을 익히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겉으로 드러나는 무위(武威)였다. 그가 정작 경계하는 것은 그 안에 담길 내공의 성장일 터. 그는 내가 외공(外功)에 치중하는 동안 내공의 성장이 더뎌지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 속도를 따라잡자, 그는 판을 바꿨다. 아예 검을 쥐지 못하게 함으로써 나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것이다.
어리석은 수. 아니, 어쩌면 지극히 교활한 수였다. 검을 잡지 못하는 조급함이 어린 제자의 마음을 흔들고, 무리한 내공 운용으로 주화입마에 빠지게 만들 수도 있다. 혹은, 성장의 길이 막혔다는 무력감에 좌절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는 덫을 놓았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고요한 수면 아래에서 지켜볼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분노로 들끓던 피가 서서히 식어갔다. 괜찮다. 검을 잡지 못하는 한 달. 그것은 나에게 다른 기회를 의미했다. 전생에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기회. 검의 초식에만 매달리느라 소홀했던 내공의 기틀을 다질 시간.
사부가 심어준 풍운심법(風雲心法)은 그 자체로 천마검(天魔劍)을 위한 그릇을 만드는 마공(魔功)의 입문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역이용할 방법을 안다. 백호문 정종의 백호심법(白虎心法)과 풍운심법의 특정 구결을 접합하여 운용하면, 마공의 파괴적인 기운을 정화하고 내공의 순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전생의 끝자락에서야 간신히 실마리를 잡았던 비법. 이번 생에서는 처음부터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검을 잡지 못하는 한 달 동안, 나는 오로지 내실(內實)을 다지는 데 집중할 것이다. 경맥을 넓히고, 단전의 기틀을 단단히 하고, 두 심법의 상충하는 기운을 조화시키는 법을 완벽하게 익힐 것이다. 한 달 뒤, 내가 다시 검을 잡았을 때, 나의 검은 이전과 차원이 다른 무게를 지니게 될 것이다.
이것은 벌이 아니라 기회다. 사부가 내던진 돌을 주워 디딤돌로 삼으리라. 나는 깊고 고요한 숨을 내쉬었다. 들숨에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채우고, 날숨에 마지막 남은 분노의 찌꺼기가 빠져나갔다. 마음이 얼음처럼 차갑고 명징해졌다. 방 안의 촛불이 소리 없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
그날 이후 나의 일과는 바뀌었다. 동이 트기 무섭게 일어나던 뒤뜰 수련장 대신, 나는 백호산 중턱의 인적 드문 공터로 향했다. 사형들이 목검을 부딪치며 함성을 지르는 시간, 나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에서 나만의 수련을 시작했다.
검은 없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쥐지 않았다. 대신 나는 땅에 단단히 뿌리내린 소나무처럼 하반신을 고정한 채, 백호검법의 자세를 하나씩 취했다. 이성(二星)의 첫 초식인 호보쌍영(虎步雙影)부터 마지막 초식인 맹호박토(猛虎搏兎)까지. 동작은 지극히 느렸다. 마치 정지된 그림을 한 장씩 넘기는 듯했다.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니었다. 나는 눈을 감고 내 몸 안의 미세한 기의 흐름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손끝에서 검이 뻗어 나가는 감각. 허리를 비틀 때 단전에서부터 팔꿈치로 전해지는 힘의 경로. 발을 내디딜 때 땅을 박차는 기운이 어떻게 척추를 타고 오르는지. 모든 것을 기억 속의 감각과 대조하며 열세 살의 미숙한 육체에 새롭게 각인시켰다.
겉보기에는 우스꽝스러운 몸짓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풍운심법의 거친 기운과 백호심법의 맑은 기운이 단전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충돌했다. 전생의 지식이 없었다면 진작에 경맥이 뒤틀려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크윽…!”
이성의 일곱 번째 초식, 호반삼전(虎頒三轉)의 허리 비트는 자세에서 옆구리에 칼로 찢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두 기운이 충돌하며 빚어낸 반발력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여기서 무너지면 끝이다. 기억 속의 운기 경로를 따라, 충돌하는 기운을 억지로 비틀어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냈다.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찢어질 듯한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두 개의 물줄기가 하나의 강으로 합쳐지듯 기운이 부드럽게 경맥을 타고 흘렀다. 이전보다 한결 넓고 단단해진 길을 따라.
“후우….”
거친 숨을 토해내며 자세를 풀자 온몸이 물에 빠진 솜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단전 깊은 곳에서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맑고 단단한 진기(眞氣)의 씨앗이 자리 잡은 것이 느껴졌다. 검을 잡지 못하는 닷새 만의 성과였다. 사부는 내가 좌절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의 감시망 밖에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방식으로 강해지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렸다. 나는 땀으로 젖은 옷을 털고 일어나 다음 자세를 준비했다. 복수는 아직 멀었다. 조급해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기다림의 무게를 아는 나이니까.
그렇게 열흘이 흘렀다. 매일 새벽, 나는 인적 없는 공터에서 나만의 수련을 계속했다. 두 심법의 충돌은 점차 줄어들었고,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게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낼 수 있게 되었다. 단전에 쌓인 내공의 양은 미미했지만, 그 순도와 밀도는 전생의 같은 시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짙어졌다.
그날도 나는 맹호박토의 마지막 자세를 취한 채 운기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막 떠오른 해가 시야를 밝혔다. 땀방울이 턱 끝에 매달려 방울져 떨어졌다. 그때였다.
“어이, 꼬마!”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낭랑하고 맑았다. 마치 이른 아침의 산새 소리 같았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시간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꼬마’라니. 백호문 안에서 감히 내게 이런 식으로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숨을 멈췄다.
열두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머리는 양 갈래로 단정하게 땋아 내렸고, 활동하기 편해 보이는 푸른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크고 까만 눈동자는 호기심으로 가득 차 반짝였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앳됐지만 훗날의 아름다움을 짐작게 했다.
유연(柳燕).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전생, 내 삶의 유일한 빛이었던 여인. 내가 지키지 못했던 정인. 그녀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살아있는 모습으로.
그녀는 나를 모른다. 지금의 그녀에게 나는 그저 낯선 사내아이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안다. 그녀의 웃음, 그녀의 눈물, 그리고… 그녀의 죽음까지도.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검도 없이 이상한 자세만 취하고. 벌서는 중이야?”
유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왔다. 특유의 거리낌 없는 걸음걸이. 나는 저 발걸음 소리를 수없이 들었었다. 내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저녁 산책길에 내 뒤를 따라올 때. 기억의 파도가 사정없이 나를 덮쳤다. 가슴을 꿰뚫었던 사부의 검날보다 더 아픈 통증이 심장을 후벼 팠다.
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수련 중입니다.”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갈라져 나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파고드는 손톱의 아픔이 간신히 이성을 붙들게 했다.
“수련? 에이, 거짓말. 수련하는 사람이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인상만 쓰고 있어? 꼭 누구한테 된통 혼나고 벌받는 모습인데.”
유연은 내 굳은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잘거렸다. 그녀는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스스럼없고, 햇살처럼 밝은 아이. 전생의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구원받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햇살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실례가 안 된다면 비켜주시겠습니까. 수련에 방해가 됩니다.”
얼음장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갑고 날 선 목소리였다. 유연의 동그란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아마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뭐야, 되게 무뚝뚝하네. 나는 유연이라고 해. 너는 이름이 뭐야?”
그녀는 주눅 들기는커녕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내게 이름을 물었다. 진소운. 그 이름 세 글자를 네 입으로 다시 듣게 될 줄이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이상 대화를 섞어서는 안 된다. 그녀와 엮이는 순간, 한천악의 시선이 그녀에게도 향할 것이다. 전생의 비극을 반복할 수는 없다. 절대로.
“말씀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매몰차게 돌아섰다. 심장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그녀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다시는 내 삶에 그녀를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야! 사람이 이름을 물으면 대답은 해줘야지! 예의가 없네!”
등 뒤에서 유연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심장에 돌덩이가 쌓이는 기분이었다. 미안하다, 유연. 정말 미안하다. 속으로만 되뇌었다.
그녀를 이대로 보내야만 했다. 다시는 마주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언제나 잔인한 방식으로 내 뒤통수를 쳤다.
“어?”
내 등 뒤에서 들려온 작은 비명. 그리고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을 돌렸다. 유연이 풀숲의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그녀의 작은 몸이 땅으로 향하는 그 찰나의 순간, 세상이 느리게 흘렀다.
머리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수천, 수만 번 그녀를 지키기 위해 움직였던 전생의 기억이 열세 살의 육체를 지배했다.
한 걸음. 백호검법의 기본 보법인 호보(虎步)였다. 땅을 박차는 순간, 단전의 진기가 폭발적으로 다리를 타고 흘렀다. 평소의 수련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 마치 공간을 접듯이 순식간에 그녀와의 거리가 사라졌다.
나의 오른손이 허공을 갈랐다. 넘어지는 그녀의 팔을 거칠게 움켜쥐는 대신, 손바닥을 부드럽게 펼쳐 그녀의 팔꿈치 아랫부분을 살며시 받쳤다. 충격을 최소화하는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 동시에 왼손은 그녀의 등 뒤로 향했다.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멈춰, 그녀가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벽이 되어주었다.
모든 것이 찰나에 일어났다. 유연의 몸이 내 손 위에서 가볍게 멈췄다. 그녀의 놀란 눈이 바로 앞에서 나를 올려다봤다. 그 커다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있지만, 그 깊은 곳에서 미친 듯이 요동치는 무언가를 담고 있는 얼굴.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옷감을 통해 전해져 오는 그녀의 미세한 체온. 코끝을 스치는 풋풋한 풀잎 향기. 전생의 기억 속, 마지막 순간에 내 품에서 차갑게 식어가던 그녀의 온기와 겹쳐졌다. 숨이 턱 막혔다.
“…….”
유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넘어질 뻔했다는 사실보다, 눈앞의 소년이 보여준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과, 그의 눈빛에 담긴 헤아릴 수 없는 슬픔에 압도당한 듯했다.
나는 재빨리 손을 거뒀다. 마치 불에 덴 것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우리 사이에 다시 차가운 거리가 생겼다. 방금 전의 온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조심하십시오.”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욱 낮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고마워.”
등 뒤에서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단지 한 번의 접촉이었을 뿐인데, 십수 년을 억눌러온 모든 감정이 수면 위로 터져 나올 뻔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철저히 외면했어야 했다. 그녀가 넘어지든 말든, 모르는 척했어야 했다. 하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진소운이라는 사내의 영혼 깊숙한 곳에, 유연을 지키는 것은 본능으로 새겨져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머릿속은 온통 유연의 얼굴로 가득 찼다. 앳된 얼굴, 호기심 가득한 눈빛, 그리고 마지막에 나를 바라보던 혼란스러운 표정.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이 다시 아려왔다. 이번 생에서 그녀를 지키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그녀의 인생에서 완벽한 타인으로 남는 것. 내가 걷는 이 복수의 길은 피와 죽음으로 얼룩져 있다. 그 어떤 따스함도 허락되지 않는 혹한의 길이다. 그녀를 이 지옥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 유연. 부디 이번 생에서는 나 같은 놈은 잊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다오. 그것이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속죄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며 결심을 다졌다. 하지만 손끝에 남은 그녀의 희미한 온기는 쉬이 사라지지 않고, 차가운 불씨 같던 내 가슴을 자꾸만 지져댔다.
그날 저녁, 무거워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운기조식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숙소로 향하는 길, 후미진 담장 아래서 익숙한 그림자 두 개가 소곤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달빛이 희미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그래도 대사형은 너무 소운이만 감싸고도는 것 같지 않나?”
이사형 조경의 목소리였다. 특유의 비꼬는 듯한 음색. 나는 저 목소리가 전생에 내 아버지를 벨 때 어떤 환희에 차 있었는지 기억한다.
“그야… 소운이가 요즘 부쩍 성장했으니, 대사형께서도 기대가 크신 것이겠지.”
삼사형 림무진의 우유부단한 대답이 이어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불안함이 섞여 있었다.
조경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성장? 나는 그게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데. 열세 살짜리가 며칠 만에 검법 이성을 깨치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나? 필시 사부님께서 따로 비급이라도 내려주신 게 틀림없어. 그런데 그걸 우리에겐 숨기고 있는 게지. 대사형은 그저 순진하게 믿고 있는 거고.”
림무진이 머뭇거렸다.
“설마… 사부님께서 그러셨을 리가.”
“왜 없겠나? 문주의 아들이잖나. 결국 백호문은 저 녀석 차지가 될 텐데. 우리는 그저 들러리일 뿐이야. 자네는 그게 분하지도 않나, 무진?”
조경의 목소리가 뱀처럼 림무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였다. 전생의 기억이 맞았다. 조경의 야심과 질투는 이미 이때부터 싹트고 있었다. 그리고 림무진의 약한 마음을 파고들어 서서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전생의 나는 이들의 이런 대화를 알지 못했다. 그저 이사형은 야심이 넘치고, 삼사형은 마음이 여리다고만 생각했다. 그들의 배신은 갑작스러운 비극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모든 비극에는 씨앗이 있다. 조경의 질투라는 씨앗은 이미 오래전부터 뿌려져, 림무진의 나약함이라는 토양 위에서 독초처럼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조용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지만,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한천악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야 하는 것도 벅찬데, 문파 내부의 썩은 가지까지 쳐내야 한다. 유연과의 만남으로 흔들렸던 마음이 다시 차갑게 식었다.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한 달. 사부가 나에게 준 한 달의 시간. 그 시간 동안 나는 내공의 기틀을 완성하고, 밖으로는 이들의 의심을 잠재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유연. 그녀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그저 멀리서나마 그녀의 안녕을 빌 뿐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차가운 불씨가 가슴속에서 다시 타올랐다. 그 불길이 나를 모두 태워 재로 만들지라도, 가야 할 길을 가야만 했다. 그것이 두 번째 삶을 얻은 나의 숙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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