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 집행》 12화. 보이지 않는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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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D 편집실
《천도 집행》  · 

방 안의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경 사형과 림무진 사형의 목소리가 담벼락 너머로 사라진 지 한참이었지만, 그 대화의 잔향은 독처럼 내 귓가에, 그리고 정신에 스며들어 있었다. 눈을 감자 두 사람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야심으로 번들거리는 조경의 눈, 그 옆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던 림무진의 눈동자.

전생의 기억 속에서 그들은 막연한 ‘배신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배신은 더 이상 미래의 일이 아니었다. 이미 내 발밑에서 자라나는 독버섯이었다. 조경은 나를 질투했고, 림무진은 그 질투에 물들고 있었다. 사부라는 거대한 산맥 외에도, 문파 내부에서부터 나를 좀먹어 들어올 균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피부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침착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열세 살의 육신은 쉽사리 마음을 따르지 않았다.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미미한 열기가 피어오르며,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진기의 흐름을 어지럽혔다. 분노, 초조함,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무력감이 뒤섞여 내공의 흐름을 방해했다. 이대로 두면 주화입마에 들지는 않더라도, 애써 쌓아 올린 미약한 공력이 흩어질 터였다.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심호흡을 시작했다. 들숨에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시고, 날숨에 단전의 탁한 열기를 밀어냈다. 사부 한천악이 내린 한 달간의 검 수련 금지. 그것은 나를 옭아매려는 족쇄였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검을 잡지 못하는 시간 동안, 나는 내공의 기초를 누구보다 단단히 다져야만 했다.

백호심법(白虎心法)의 정제된 기운과 풍운심법(風雲心法)의 거친 기운. 두 개의 서로 다른 물줄기를 하나의 강으로 합치는 작업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다. 전생의 나는 사부가 이끄는 대로 풍운심법에만 매달렸고, 그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파멸뿐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달랐다. 백호문의 정통 내공심법인 백호심법을 뿌리로 삼고, 풍운심법은 그 가지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풍운심법의 폭발적인 기운을 백호심법의 안정적인 틀 안에 가두어, 언제든 내가 원할 때 터뜨릴 수 있는 비수(匕首)로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감정이 요동치는 상태에서는 두 기운이 충돌하여 경맥을 상하게 할 뿐이었다. 나는 억지로 운기를 시도하는 대신, 마음을 다스리는 데 집중했다. 조경의 얼굴을 지우고, 림무진의 목소리를 잊었다. 유연 사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 역시 밀어냈다. 지금 내게 허락된 것은 오직 복수라는 단 하나의 길뿐. 그 길 위에 놓인 감정의 돌부리들은 모두 걷어내야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창밖이 희미하게 밝아올 무렵, 비로소 단전의 열기가 가라앉고 진기가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해졌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새벽의 차고 신선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오늘 하루도, 생존을 위한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 * *

백호문 후산(後山)의 대나무 숲은 이른 아침이면 늘 안개에 잠겨 있었다. 인적이 드문 이곳이야말로 나의 비밀 수련장이었다. 사부의 눈을 피하고, 다른 사형제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서도 자유로운 곳. 나는 빽빽한 대나무들 사이, 작은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검 수련 금지’ 명령은 역설적으로 내게 시간을 벌어주었다. 검의 성취가 너무 빠르면 사부의 의심과 견제는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한 달. 그 시간 동안 나는 겉으로는 운기조식에만 전념하는 순종적인 제자의 모습을 보이면서, 물밑에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내공의 기틀을 다질 생각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백호심법의 첫 구절부터 운기하기 시작했다. 단전에 모인 실낱같은 진기가 척추를 타고 천천히 상승했다. 열세 살의 몸은 아직 경맥이 완전히 열리지 않아, 진기가 흐르는 감각이 마치 좁은 수로를 억지로 비집고 나가는 듯 답답했다. 전생의 기억 속에서는 드넓은 강처럼 흐르던 기운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졸졸거리는 시냇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조급해하지 않았다. 회귀가 내게 가르쳐준 가장 큰 교훈은 인내였다.

백호심법의 순정한 기운이 온몸을 한 바퀴 순환하며 경맥을 부드럽게 덥혔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가장 위험한 시도를 할 차례였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풍운심법의 첫 구절을 떠올렸다.

‘풍기운행(風起雲行), 기귀단전(氣歸丹田)…’

풍운심법의 기운은 백호심법과는 그 성질부터가 달랐다. 마치 길들지 않은 야생마처럼 거칠고 폭발적이었다. 단전 한구석에서부터 회오리처럼 솟아난 풍운심법의 진기는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백호심법의 진기와 만나자마자 격렬하게 충돌했다.

크윽!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단전이 칼로 헤집는 듯한 통증과 함께, 두 기운이 서로를 밀어내며 경맥을 뒤흔들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전생의 지식이 없었다면 이 단계에서 이미 주화입마의 문턱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스물두 번째 줄. 갈림길은 그곳이다.’

전생에서 수없이 반복하며 몸에 새겼던 풍운심법의 구결. 그중 스물두 번째 줄의 특정 혈도를 지날 때, 진기의 흐름을 미세하게 비트는 것이 핵심이었다. 사부는 그 부분을 그저 빠르게 지나가도록 가르쳤지만, 그곳이야말로 풍운심법의 마성(魔性)을 제어하고 다른 심법과 접합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나는 고통을 억누르며 의식을 집중했다. 충돌하는 두 기운 사이로 가느다란 길을 낸다는 상상을 했다. 백호심법의 진기로 둑을 쌓고, 그 안으로 풍운심법의 거친 물줄기를 유도하는 것이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마치 성벽의 작은 틈으로 스며드는 물처럼, 풍운심법의 기운이 백호심법의 기운 속으로 조심스럽게 섞여 들기 시작했다.

온몸의 신경이 바늘 끝처럼 곤두섰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내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마침내, 거칠게 날뛰던 풍운심법의 기운이 백호심법의 흐름에 완전히 동화되어 하나의 줄기처럼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후우….”

성공이었다. 비록 아직은 미약하기 그지없지만, 두 개의 심법은 분명 하나의 흐름으로 합쳐졌다. 이전보다 훨씬 더 밀도 높고 강력한 진기가 단전에서 고요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이 수련을 한 달간 반복한다면, 나는 검을 잡지 않고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의 기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때였다. 대나무 숲 저편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네까짓 게 감히 우리 앞을 막아서?”
“계집애가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개방(丐幫) 출신이면 빌어먹는 법이나 배울 것이지, 어디서 주워들은 의협심 흉내야?”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댓잎 사이로 몇몇 인영이 보였다. 덩치 큰 사형 두 명이 대여섯 살은 어려 보이는 어린 제자 하나의 멱살을 잡고 희롱하고 있었고, 그 앞을 한 소녀가 가로막고 있었다.

유연(柳燕) 사저였다.

그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두 사형을 노려보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같은 문중의 사제를 괴롭히는 게 백호문 제자가 할 짓입니까? 당장 그만두지 못해요!”

멱살을 잡고 있던 사형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누군가 했더니, 유연 사매 아니신가. 늘 그렇게 정의감이 넘쳐서 탈이라니까. 이건 우리와 저놈 사이의 일이야. 사매는 빠지는 게 어때?”

“싫다면요?”

유연은 허리춤에 찬 짧은 막대기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개방에서 쓰던 타구봉(打狗棒)을 본뜬 호신용 단봉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전생과 똑같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고집 센 눈빛. 그 눈빛 때문에 결국 그녀는 죽음을 맞았다.

나는 몸을 낮춰 대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관여해서는 안 된다. 유연과 엮이는 순간, 나의 계획은 틀어지게 된다. 그녀를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그녀의 인생에 내가 없는 것이다. 어제 다짐했던 사실을 다시금 되뇌었다.

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형은 유연의 기세에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킬킬거렸다.
“싫다면? 하, 이거 정말 재미있는 계집애일세. 그래, 네가 저놈 대신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리려나?”

한 놈이 성큼 다가서며 손을 쳐들었다. 유연은 단봉을 들어 막을 자세를 취했지만, 체격 차이가 너무 컸다. 저 손찌검을 막아내기는 어려울 터였다.

나는 땅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 하나를 조용히 집어 들었다.

* * *

“어디서 건방지게!”

사형의 손바닥이 유연의 뺨을 향해 날아들었다. 유연은 이를 악물고 단봉을 휘둘러 막아보려 했지만, 상대의 손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봉을 가볍게 쳐내 버렸다. 힘의 차이가 역력했다. 유연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주제도 모르고 나서는 년.”

사형의 눈에 경멸이 가득했다. 그의 손바닥이 다시 한번, 이번에는 훨씬 더 빠르고 강하게 날아들었다. 멱살을 잡혀 덜덜 떨고 있던 어린 제자는 겁에 질려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쉬익- 하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무언가가 허공을 갈랐다. 너무나 작고 빨라서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다. 손바닥을 휘두르던 사형의 발목 근처, 땅바닥에 박혀 있던 대나무 뿌리. 그 위를 스치듯 지나간 돌멩이가 정확히 뿌리의 가장 튀어나온 부분을 때렸다.

타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형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억!”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는 유연을 때리려던 기세 그대로 앞으로 쏠리며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대나무 숲 바닥은 부드러운 흙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돌멩이와 마른 댓잎, 그리고 단단한 뿌리들이 뒤엉켜 있었다.

“커헉…!”

사형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코피가 터지고 입술이 찢어졌다. 그는 황급히 얼굴을 감싸 쥐고 일어났지만,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이, 이게 무슨…!”

함께 있던 다른 사형도, 유연도, 심지어 넘어진 당사자조차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운 나쁘게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손가락 끝에 남은 미세한 감각을 갈무리했다. 전생에서 암기를 익혔던 기억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공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그리고 가장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법. 내공을 실어 던진 것이 아니기에, 그 누구도 이것이 인위적인 공격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없을 터였다.

코피를 흘리던 사형이 벌떡 일어나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이, 이년이! 네년이 무슨 수작을 부렸지!”
“제가 뭘 했다고요!”
유연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도 혼란이 가득했다.

분노에 찬 사형이 다시 유연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나는 두 번째 돌멩이를 던졌다. 이번의 목표는 다른 사형이 멱살을 잡고 있던 어린 제자의 손이었다.

이번에도 돌멩이는 소리 없이 날아갔다. 그리고 어린 제자가 겁에 질려 늘어뜨리고 있던 손가락 끝을 정확히 스치고 지나갔다.

“앗!”

아무런 힘도 실리지 않은 돌멩이였지만, 갑작스러운 충격에 어린 제자는 저도 모르게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그 작은 움직임이, 그를 붙잡고 있던 사형의 손목을 절묘하게 후려쳤다.

“악!”

멱살을 잡고 있던 사형이 손목을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어린 제자의 손톱에 긁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는 어린 제자를 밀쳐내며 소리쳤다.
“이 쬐끄만 놈이!”

두 사형은 이제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한 놈은 갑자기 넘어져 코가 깨지고, 다른 한 놈은 포로처럼 잡고 있던 꼬마에게 역으로 손목을 공격당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들은 이 기묘하고 재수 없는 상황에 완전히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뭐야, 이 재수 없는 것들은!”

코피를 쏟던 사형이 침을 뱉으며 소리쳤다. 그는 유연과 어린 제자를 번갈아 노려보았지만, 더 이상 손을 대지는 못했다. 연이어 일어난 불운한 사건들이 그들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 놓은 것이다.

“두고 보자…!”

그들은 찝찝한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마치 이 장소에 더 있다가는 또 무슨 재수 없는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듯, 도망치듯 사라졌다.

고요해진 대나무 숲에는 유연과 어린 제자, 그리고 숨어 있는 나, 셋만이 남았다.

* * *

“괜찮으냐?”

유연이 다가가 넘어져 있던 어린 제자를 부축해 일으켰다. 어린 제자는 아직도 겁에 질려 있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고, 고맙습니다, 사저….”
“됐다. 앞으로는 저런 자들이 보이면 피하거라. 상대해서 좋을 것 없다.”

유연은 어린 제자의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며 다정하게 타일렀다. 영락없는 마음 따뜻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전생에 내가 사랑했던 바로 그 모습. 나는 가슴 한구석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몸을 돌렸다. 이제 이곳을 떠나야 했다.

“거기 누구 있어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돌아보자, 유연이 이쪽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예리한 칼날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인기척이 느껴졌는데. 나와요.”

들킨 건가. 그럴 리가. 나는 기척을 완벽하게 숨겼다. 내공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발견했을 리 없다. 아마도 만일을 위해 떠보는 것이리라. 나는 움직이지 않고 숨을 참았다.

하지만 유연은 포기하지 않았다.
“숨어만 있지 말고 나오라니까요! 방금… 도와준 거, 당신이죠?”

그녀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나는 의아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개방 출신이라 감각이 남다른 것인가. 아니면 그저 그녀의 직감인가.

“사저, 그만 가보겠습니다.”

어린 제자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이제 대나무 숲에는 정말로 유연과 나, 단둘만 남게 되었다.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끈질기게 이쪽을 노려봤고, 나는 여전히 대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결국, 먼저 움직인 것은 나였다. 이대로 대치해봤자 좋을 것이 없었다. 나는 천천히, 아무렇지 않은 척 대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방금 이곳을 지나가던 사람처럼.

“……!”

나를 본 유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내가 여기서 나타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너는… 진소운?”
“유연 사저님.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나는 최대한 무감정한 표정으로,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 어제 일부러 차갑게 대했던 태도를 그대로 유지했다.

유연은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방금 지나가던 길이었습니다.”
“거짓말. 아까부터 계속 거기 있었잖아. 내가 똑똑히 느꼈는데.”
“잘못 느끼신 거겠지요.”

나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지금은 감정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그녀와 엮여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인 경계심이 온몸을 감쌌다.

유연은 내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까 그 일, 네가 한 짓이지? 돌멩이 던진 거.”
“제가 왜 그런 짓을 합니까. 그리고, 돌멩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내 시치미에 유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모르긴 왜 몰라! 그 사형들이 넘어진 거, 우연이 아니었잖아! 네가 던진 돌멩이 때문에….”
“증거라도 있습니까?”

나는 그녀의 말을 차갑게 끊었다.
“만약 제가 했다면, 왜 숨어 있었겠습니까. 당당히 나서서 도왔겠지요. 사저님처럼 말입니다.”

내 말은 논리적으로는 맞았지만, 어딘가 가시가 돋쳐 있었다. 유연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비꼬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너… 말투가 왜 그래? 어제부터 자꾸 삐딱하게….”
“원래 이렇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 대화를 꿀 생각이 없다는 듯,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하고는 몸을 돌렸다. 한 걸음이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의 얼굴을 오래 마주하고 있으면, 얼음처럼 굳힌 내 결심에 균열이 생길 것만 같았다.

“잠깐만!”

유연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눈에는 이제 분노와 함께 알 수 없는 서운함 같은 것이 어리고 있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너 정말 재수 없게 구는구나.”
“고맙다는 말을 들을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

그녀는 할 말을 잃은 듯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차가운 가면 뒤에서, 심장이 아프게 욱신거렸다. 전생의 기억 속, 그녀는 늘 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그 따스했던 미소를 내 손으로 지워버리고 있다는 사실이 칼날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게 널 위한 길이다, 유연아.’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없는 너의 삶. 그것이 내가 이번 생에서 너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었다.

“비켜주십시오, 사저님.”

내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유연은 잠시 나를 더 노려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길을 비켜주었다. 나는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등 뒤에 꽂히는 그녀의 시선이 불처럼 뜨거웠지만,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대나무 숲을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그녀를 밀어내는 것은, 내 과거의 일부를 칼로 도려내는 것과 같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 * *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나는 곧장 아버지의 거처로 향했다. 문주 진광호(陳光虎)의 집무실. 예고 없이 찾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맞았다.

“소운이냐.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아버지는 서류 더미에서 눈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피로가 깃들어 있었지만, 아들을 보는 시선만은 따뜻했다. 전생에서, 이 눈빛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사부의 칼에 문중이 무너지던 날, 아버지의 시신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아버님께 문안 인사 올립니다.”

나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되었다. 편히 앉거라.”

아버지는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말없이 다가가 앉았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를 부른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온 것이었기에, 용건은 내게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그래, 해보거라.”

“한 달간 검 수련을 금지당했습니다. 한 사부님께서 내린 명입니다.”

내 말에 아버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한 사제가? 어째서?”
“제 성장이 너무 빨라, 기초가 부실해질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당분간은 내공 수련에만 전념하라 하셨습니다.”

나는 사부가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겼다. 아버지는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한 사제의 안목은 늘 정확했으니. 그가 그리 판단했다면 따르는 것이 맞다.”

역시나. 아버지는 한천악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그 신뢰가 백호문을 파멸로 이끌 독이라는 사실을, 지금의 아버지는 알지 못했다. 나는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증거도 없거니와, 설령 있다 한들 열세 살 아들의 말을 믿어줄 리 만무했다.

“저 또한 사부님의 깊은 뜻이라 생각하고 명을 따르고 있습니다. 다만….”

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 아버지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다만, 검을 잡지 못하니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혹, 아버님께서 문중의 서고 출입을 허락해 주신다면, 그 시간 동안 무학의 이론이라도 더 깊이 공부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를 찾아온 진짜 이유였다. 백호문의 서고. 그곳에는 백호검법과 심법의 원전뿐만 아니라, 역대 선조들이 강호를 편력하며 모아온 각종 무공의 비급과 이론서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물론, 핵심 비급들은 문주와 장로들만 열람할 수 있었지만, 일반 제자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자료들도 상당수 있었다.

전생의 나는 무공 수련에만 미쳐 있었기에 서고를 찾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부의 계획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지식의 폭을 더 넓혀야만 했다. 특히, 풍운심법과 같은 마공의 특성을 지닌 무공에 대한 자료가 절실했다.

내 제안에 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자가 서고 출입을, 그것도 무공 이론을 공부하겠다며 직접 청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기특한 생각이구나.”

이윽고 아버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네 나이 때의 아이들은 그저 검을 휘두르기만 좋아할 뿐, 이치를 탐구하려 하지는 않는데 말이다. 좋다. 내가 허락하마. 다만, 핵심 비급들이 보관된 내실(內室)은 들어갈 수 없다. 외실(外室)의 서책들이라면 얼마든지 읽어도 좋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이 허리를 숙였다. 예상보다 쉽게 허락이 떨어졌다. 아버지는 나의 학구열을 대견하게 여기는 듯했다.

“네가 최근 들어 부쩍 어른스러워졌다는 말을 들었다. 마진도, 다른 사제들도 모두 너의 성장을 놀라워하더구나.”
아버지의 목소리에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칭찬이 비수처럼 심장을 찔렀다. 나의 성장은, 이 모든 비극을 막기 위한 발버둥침일 뿐이었다.

“한 사제는 네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너는 우리 백호문의 미래다, 소운아.”

미래. 그 단어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아버지의 기대를, 문중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파괴할 원수가, 바로 아버지가 가장 신뢰하는 사제라는 사실을 홀로 알고 있었다.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목이 메어왔지만, 간신히 대답을 쥐어짰다. 집무실을 나올 때, 등 뒤로 느껴지는 아버지의 따뜻한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 * *

밤이 깊었다. 나는 내 방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오늘 하루의 일들을 복기하고 있었다.

이사형 조경과 삼사형 림무진. 내부의 적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그리고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앞으로 그들의 행동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유연 사저. 그녀와의 만남은 가슴에 날카로운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나의 선택은 옳았다. 그녀를 멀리하는 것만이 그녀를 지키는 길이다. 오늘처럼 위험한 상황이 다시 생긴다면, 그때도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흔적을 남기지 않고 그녀를 도와야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검’이 되어서.

그리고 아버지. 그의 신뢰와 기대는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자,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족쇄였다.

마지막으로 사부 한천악. 그는 나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검을 빼앗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만들어준 시간 속에서 새로운 무기를 벼리고 있다. 내공이라는 보이지 않는 무기, 그리고 지식이라는 더 날카로운 무기를.

나는 창밖의 어두운 하늘을 보았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바로 저 밤하늘과 같을 것이다. 외롭고, 어둡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

하지만 나는 걸어야만 했다. 내 등 뒤에 있는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간 그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다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백호심법과 풍운심법의 기운이 이전보다 한결 부드럽게 어우러지며 단전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고통스럽지만, 분명 강해지고 있었다.

한 달 뒤, 내가 다시 검을 잡는 날. 사부 한천악은 놀라게 될 것이다. 얌전한 양인 줄 알았던 제자의 몸 안에, 호랑이가 자라고 있음을 알게 될 테니까.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의식 속에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결코 멈추지 않겠다고. 이번 생에서는 반드시, 모든 것을 되돌려 놓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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