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티노 칸타레》 2화. 해님과 바람, 그리고 나그네
탄 냄새였다.
눈을 뜨기도 전에 먼저 코를 찔렀다. 목재가 타다 남긴 것인지, 아니면 오래된 기름이 검게 눌어붙은 것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복합적인 냄새였다.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그 냄새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기도를 긁었고, 김명령은 그 자극에 이끌려 반쯤 감긴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검게 그을린 콘크리트 천장이었다.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틈 사이로 먼 하늘이 보였다. 잿빛이었다. 새벽인지 저녁인지조차 알 수 없는, 빛도 어둠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의 하늘이었다. 김명령은 잠시 그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팔꿈치로 바닥을 짚는 순간 손바닥 아래로 모래와 잔자갈이 느껴졌고, 피부가 쓸렸다. 통증은 있었다. 그 통증이 어떤 식으로든 그를 현실에 붙들어두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공장이었다. 불을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곳곳에 아직 연기가 피어올랐고, 무너진 철골 사이사이에 검은 재가 쌓여 있었다. 한쪽 벽은 통째로 내려앉아 있었고, 그 너머로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재가 얕게 흩날렸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여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었지만 목구멍이 메말라 있었다. 간신히 만들어낸 소리는 제대로 된 단어도 아니었다.
기억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있어야 할 기억과 있는 기억의 경계가 뒤섞여 어느 것이 진짜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아팠다.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더니 맥박이 둔탁하게 고동쳤다.
그때였다.
"여기 아직 사람 있습니다!"
멀리서 남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터졌다. 그 직후로 발소리가 여럿 들렸다. 두껍고 단단한 부츠 밑창이 잔해를 밟는 소리였다. 김명령은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소방복을 입은 사람들이 잔해를 헤치며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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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은 2인실이었다. 창문 너머로 도로가 보였고, 차들이 지나갔다. 번호판 모양이 낯설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차들은 자신이 알던 2001년의 차가 맞았다. 형태도, 색깔도, 거리의 분위기도.
경찰은 두 명이 왔다. 한 명은 나이가 들었고, 다른 한 명은 신입처럼 보였다. 나이 든 쪽이 말을 주도했다.
"신분 조회 해봤더니 김명령 씨, 전과 없고 K대 재학생이에요. 그런데 폐공장에 왜 있었어요?"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심문하러 온 것이지 걱정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태도가 문장 하나하나에 배어 있었다.
김명령은 잠시 생각했다. 기억이 없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없기도 했다. 폐공장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불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자신이 그 안에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단 한 조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기억이 안 납니다."
"기억이 안 난다고 끝이 아니에요. 그 불길 속에서 살아나온 것도 이상한데 몸에 화상 자국 하나 없는 게 말이 됩니까."
사실이었다. 병원 침대에 누운 자신의 팔을 살펴봤을 때 피부는 멀쩡했다. 불길 속에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실이 경찰을 의심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고, 솔직히 말하면 김명령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도 모르는 걸 어떻게 말합니까. 저도 지금 머리가 복잡합니다."
"우선 정신과 진료 받고요. 용의 선상에 있으니까 멀리 가지 마세요."
나이 든 경찰이 그 말을 끝으로 일어서려 했다. 김명령은 그 순간 피로가 한꺼번에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몸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서 오는 피로였다.
"잠깐요."
경찰이 멈추었다.
"증거가 있으면 증거 가지고 오세요. 없으면 저한테 용의자라고 말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 기억도 없고 몸 상태도 안 좋습니다. 더 드릴 말씀이 없으니 돌아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간신히 뱉어낸 말이었지만 어조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경찰 둘이 서로를 한 번 쳐다보았다. 나이 든 경찰이 작은 소리로 뭔가 중얼거리며 병실 문을 나갔다.
간호사가 체온을 재고 나간 뒤, 병실에는 김명령 혼자 남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자신이 지금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정리하기 시작했다.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자신은 2020년에서 왔다. 그리고 지금은 2001년이다. 그런데 이곳은 자신이 알던 2001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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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로비 CD기 앞에서 카드를 넣었을 때, 잔고를 확인하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그리고 억.
숫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십억을 훌쩍 넘겼다. 화면을 두 번, 세 번 다시 읽었다. 변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당시 자신의 통장 잔고는 생활비 조금과 학부모님이 대주는 용돈이 전부였다. 10만 원도 없었다고 기억한다. 그런데 지금 이 통장에는 10억이 넘는 돈이 들어 있었다.
지갑을 뒤졌다. 현금은 만원짜리 네 장이 전부였다. 그러나 카드 옆에 키 카드 한 장이 끼어 있었다. 스카이 팰리스. 금박으로 찍힌 두 글자가 형광등 아래서 반짝였다.
과거에 그 아파트에 대한 뉴스를 본 기억이 있었다. 강남에 들어서는 초고층 주상복합이라고, 분양가가 어마어마하다고.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이야기라고 귓등으로 흘렸던 기억이었다.
그런데 그 아파트의 키 카드가 자기 지갑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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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문을 열었을 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100평이 넘는 공간이었다. 통유리 창 너머로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였고, 멀리 한강의 반짝임이 보였다. 인테리어는 고급스러웠다. 그러나 그 고급스러운 공간 위에 잔뜩 흐트러진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다. 소파 위에, 바닥 위에,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티셔츠, 바닥에 뒹구는 캔 두세 개, 싱크대 위에 쌓인 라면 봉지들.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자신이었다. 아마.
그는 소파 한쪽을 치우고 앉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었다.
전화를 걸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한 번 정리했다. 비밀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확인은 해야 한다.
"어, 아들?"
어머니 목소리였다.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목구멍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어, 잘 지내시죠?"
"어, 잘 지내지. 불편한 건 없어?"
"없어요. 어머니, 혹시... 로또 당첨됐어요?"
전화기 너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났다.
"호호, 애 좀 봐. 그거 비밀로 하기로 했잖니. 어디 가서 당첨됐다고 말하고 다니지 마. 그지처럼 달라붙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얼마나 됐어요?"
"오늘따라 이상하다, 너. 엄마랑 아빠랑 너랑 한 장씩 사서 60억씩 당첨됐잖니. 돈 떨어졌어?"
전화를 끊고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창밖의 도심이 무심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도시 어딘가에 이지수가 있을 것이었다. 나영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001년이니까. 그러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몸이 받아들이는 것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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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인터넷 창을 열고 기억 속에 있는 사건들을 하나씩 검색했다. 1990년대 중반의 백화점 붕괴 사건. 한국 현대사에 굵직하게 남아있는 그 재난. 검색 결과가 없었다. 이름도, 날짜도, 단 한 줄의 기사도 없었다.
다섯 소년 실종 사건. 자신이 초등학교 때 뉴스에서 봤던, 결말 없이 미제로 남아 사람들의 마음속에 박혀 있는 그 사건. 검색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기억하는 역사는 이 세계의 역사가 아니었다.
김명령은 그 결론에 도달했을 때, 한 시간쯤 그냥 앉아 있었다. 모니터 화면이 슬립 모드로 꺼졌고, 그 어두운 화면에 자신의 얼굴이 어렴풋이 비쳤다. 20세의 얼굴이었다. 주름도 없고, 흰머리도 없고, 세상에 치인 흔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여긴 내가 알던 과거가 아니다.'
그 생각을 굳히고 나서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지수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복수를 준비해야 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을 불리려면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 정보를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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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글(Doogle)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인터넷 검색 서비스를 하는 작은 벤처 기업이었다. 2001년 현재 시가총액이라고 할 것도 없는 초창기 회사였지만, 김명령의 기억 속에서 그 회사는 몇 년 후 국내를 넘어 아시아 최대 포털로 성장했다. 현재의 주가는 바닥이었다. 지금 전 재산을 쏟아부으면 몇 년 뒤 수십 배로 불어날 것이었다.
그 확신으로 통장을 털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두글은 성장했다. 그러나 그가 기억하는 것처럼 아시아를 제패하는 방향으로는 가지 않았다. 내부 분열이 생겼다. 창업자들이 싸웠고, 기술 유출 이슈가 터졌다. 주가는 반토막이 났다.
재산의 절반이 사라졌다.
남은 돈으로 부동산을 봤다. 강남. 자신의 기억으로는 강남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땅이 될 것이었다. 당연히 강남에 빌딩을 샀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는 교통망이 다른 방향으로 뚫렸다. 강북으로 노선이 집중되면서 강북 시세가 강남을 앞질렀다. 유동인구가 강북으로 쏠렸다. 강남의 빌딩은 공실률이 올랐다.
두 번 틀렸다.
김명령은 그때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는 이 세계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자신의 기억 속 공식이 통하지 않는 세계였다.
꼭 누군가가 반대로 비틀어놓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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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이 지났다.
2006년. 김명령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지만, 눈빛은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스카이 팰리스의 화려한 아파트는 오래전에 처분했다. 전 재산이 사라지는 데는 예상보다 빠른 시간이 걸렸다.
이지수를 찾는 일도 동시에 진행했다. 흥신소를 여러 군데 돌아다녔다. 아내의 어릴 적 얼굴, 다니던 학교, 기억 속의 친구 이름들을 모두 제공했다. 탐문도 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이지수의 동선을 따라 학교를 찾아갔고, 사진을 들고 다녔다.
그녀는 없었다.
어느 학교의 재적부에도 이름이 없었다. 그 동네에 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친구들 기억 속에도 없었다.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 세계에서 이지수는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았다.
무일푼이 되었을 때, 남은 것은 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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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다.
서울의 봄비는 차가웠다. 옷이 젖었지만 김명령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행선지가 없었다. 그냥 걸었다. 신호등을 지나치고, 골목을 돌았다. 포장마차의 노란 불빛이 보였을 때 발이 저절로 그쪽을 향했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소주를 시켰다. 포장마차 주인인 중년 여성은 묻지 않고 잔을 내밀었다. 김명령은 잔을 들고 비워냈다. 다시 채웠다. 다시 비웠다.
"지수야... 어딨니."
중얼거림이었다.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나영아."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가슴 어딘가가 무너지는 느낌이 왔다. 딸의 이름이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 세계에서는 아직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딸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선명했다. 뛰어다니던 작은 발, 아빠 등에 업혀 잠들던 따뜻한 무게. 그 모든 것이 다른 세계의 일이고, 이미 죽은 아이의 기억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그를 짓눌렀다.
눈물이 나왔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총각, 이제 일어나요. 나 문 닫아야 해."
포장마차 주인이 등을 떠밀듯 말했다. 김명령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잔을 하나 더 달라고 했더니 포장마차 주인이 손을 내저었다.
"됐어, 얼른 가. 비 맞으면 감기 걸려."
그렇게 내몰렸다.
빗속으로 나왔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에 번졌다. 오렌지빛 빛무리가 물 위에서 흔들렸다. 김명령은 그 흔들리는 빛을 바라보며 한 걸음, 두 걸음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김명령 씨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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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지 않았다. 처음에는.
술기운이 있었다. 낯선 목소리가 자기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이 실감나는 데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천천히 뒤를 돌았다.
검은 정장이었다. 검은 중절모였다. 빗속에 서 있는데 옷이 젖지 않았다. 빗방울이 그를 비껴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비가 그에게는 내리지 않는 것인지. 김명령은 그 이상한 세부사항을 취기 속에서도 알아챘다.
"뭐야, 누군데 내 이름을 알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남자는 웃었다. 소리 없이, 입꼬리만 살짝 올라가는 방식으로.
"워워, 진정하세요.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눈빛이 사납네요."
남자가 먼저 말을 이었다.
"사람을 칠 듯한 눈빛이에요."
김명령이 퉁명스럽게 받았다.
"눈이 작아서 뜨면 좀 그렇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진정하시고, 저기 벤치에 앉아서 잠깐 얘기 나누시죠."
"내가 당신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저는 명령이라는 이름이라 명령 받는 걸 좀 싫어합니다."
남자는 이번에는 소리 없이 웃는 정도를 넘어서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흠흠. 이지수 씨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그 이름 두 글자가 나오는 순간, 취기가 반쯤 달아났다.
"당신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목소리가 낮아졌다.
남자는 대답 대신 빗속에서 벤치 쪽으로 걸어갔다. 김명령은 잠시 그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벤치에 앉았다. 빗방울이 머리에 떨어졌다. 남자 쪽으로는 여전히 내리지 않았다.
"다시 인사 드리겠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제 이름은 루시퍼라고 합니다. 루시퍼(Lucifer)."
김명령은 잠시 말을 잃었다.
"지금 나한테 장난치는 거요?"
"악마들은 원래 장난을 좋아하죠. 내기도 좋아하고요."
루시퍼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이지수 씨 정보를 말씀드리기 전에 이야기를 하나 먼저 들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드리는 정보가 맥락에 맞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이야기보다 정보가 먼저요."
"흠흠. 그렇게 하시면 아마 이해가 안 되실 겁니다."
김명령은 빗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이 남자를 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었다. 5년 동안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인간이 엉터리라 해도, 그냥 돌아서는 것보다 들어보는 쪽이 나았다.
"빨리 말해요."
"아주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알고 계실 거예요."
루시퍼는 검은 중절모 챙을 두 손가락으로 살짝 고쳐 쓰며 말을 이어갔다.
"나그네가 지나가는데, 해님과 바람이 내기를 했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의 외투를 누가 먼저 벗기는지."
"그거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동화잖아요. 바람이 강하게 불었지만 나그네가 외투를 더 꼭 여미었고, 해님이 따뜻하게 햇빛을 비추자 나그네가 스스로 외투를 벗었다. 해님의 승리. 그 얘기요?"
"흠흠, 맞습니다. 그런데 그건 공식적인 결말입니다."
루시퍼가 천천히 말했다.
"비하인드가 있습니다."
김명령이 눈썹을 찡그렸다.
"바람은 처음에 살살 불었습니다. 그러다가 더 강하게, 더 강하게 불었습니다. 나그네는 버텼습니다. 그래서 바람은 한계까지 밀어붙였습니다. 너무 강한 바람이 불었고, 나그네는 날아갔습니다. 아주 높이까지. 그 와중에 외투가 벗겨졌습니다. 기술적으로는 바람이 이긴 겁니다."
"그래서?"
"나그네가 너무 높은 곳까지 날아갔다가 떨어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결말이 너무 처참하니까 사람들이 해님의 승리로 이야기를 마무리한 거죠."
빗소리가 잠시 크게 들렸다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내기의 상품은 세상의 네 번째 파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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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이요."
김명령이 한 음절씩 뱉었다.
루시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것을 설명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술이 더 빠르게 달아나는 것 같았다.
"저는 천사라는 존재와 한 몸을 공유합니다."
루시퍼가 말했다. 빗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잘 들렸다. 빗소리에 묻히지 않고, 오히려 빗소리를 뚫고 귀에 와 박혔다.
"태고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한 몸에서 번갈아 가며 살아왔습니다. 천사가 몸의 주인일 때는 인간들이 이롭습니다. 풍년이 들고, 기술이 발전하고, 자연재해가 줄어듭니다. 저 거리의 저 십자가들도 결국 그 천사 덕에 먹고사는 것이죠."
김명령은 반박하려다 멈췄다. 어차피 5년 전에 평행세계로 떨어진 사람이 이 이야기를 '말도 안 된다'고 일축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제가 몸을 가질 때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재해가 일어납니다. 노아의 방주. 들어보셨겠죠."
"그게 당신 짓이라고요?"
"세상을 몇 번 파멸시킨 적이 있습니다."
루시퍼는 담담하게 말했다. 자랑도 아니고, 고백도 아닌 어조였다. 그냥 사실을 나열하는 것처럼.
"그래서 지금 여섯 번째 세상의 파멸을 건 내기를 진행 중입니다."
그 말이 공기 속에 가라앉았다.
"여섯 번째."
"네."
"그 내기에서 나그네 역할이—"
"당신이 당첨되셨습니다, 김명령 씨."
정적이 왔다. 빗소리만 있었다. 아스팔트 위에 빗방울이 부서지는 소리. 가로등 아래 번지는 오렌지빛. 그리고 빗속에서 옷도 젖지 않는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어떤 내기인지 말해줄 거요?"
김명령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흠흠.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재미를 위해서죠."
이 대답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들으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당신이 진짜 내가 겪은 모든 일의 원흉이라면."
김명령이 천천히 말했다. 손이 쥐어졌다.
"신이라고 해도, 악마라고 해도. 반드시 죽여버리겠습니다."
루시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소름끼치는 미소였다. 눈이 웃지 않았다. 입만 웃고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요. 저는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제 존재 자체가 죽음이니까요."
웃음소리가 났다. 낮고, 목 뒤에서 긁히는 듯한 소리였다.
"하하하하."
빗속에서 그 웃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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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은 그만하고. 이지수가 어딨는지 말하세요."
김명령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맞습니다. 힌트를 드리려고 온 것이니까요. 저의 관대함에 감사하셔도 됩니다."
루시퍼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빗줄기 사이로 검은 챙이 기울었다.
"앞으로 당신이 찾아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이지수 말고요?"
"그 전에 먼저 찾아야 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루시퍼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김명령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인형사."
"인형사?"
"그가 이 사건의 모든 원흉입니다. 당신을 이 세계로 끌어온 것과 연결된 존재이고."
루시퍼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당신 딸을 죽인 자도 그입니다."
그 말이 심장을 관통했다.
나영.
딸의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손가락 끝까지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김명령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벤치가 뒤로 밀렸다.
"뭐라고요."
"감정은 나중에 정리하시고."
루시퍼가 차분하게 말했다. 당장 눈앞의 남자를 잡아 흔들고 싶었다. 두 손이 주먹으로 쥐어져 있었다.
"그 이름 한 가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인형사. 그를 찾으십시오."
"어떻게 찾아요. 이름도 그게 다야? 얼굴도, 위치도—"
"흠흠. 그건 당신이 알아내실 일이죠."
루시퍼가 다시 웃었다.
"그리고."
그가 오른손을 들었다.
"저의 관대함으로 한 번 더 리셋해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잘 해보시기 바랍니다, 김명령 씨."
"잠깐—"
무언가가 번쩍였다.
눈이 아팠다. 빛이 아니었다. 빛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날카롭고 너무 빠른 무언가였다.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끝났다.
'툭.'
소리가 들렸다. 아주 단순하고, 아주 건조한 소리였다.
김명령은 자신의 시야가 갑자기 낮아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낮아진 것이 아니었다. 땅을 향하고 있었다. 아스팔트의 물웅덩이가 가득한 표면이 눈 가득히 들어왔다. 그리고 쿵, 하는 진동과 함께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자신의 몸이 쓰러지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 한 박자가 걸렸다.
목과 몸이 분리되어 있었다. 시야가 아스팔트 위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하나, 둘, 셋. 아주 천천히, 슬로우모션처럼. 그 빗방울들이 웅덩이에 동그란 파문을 만들어냈다.
통증은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루시퍼의 구두 끝이 시야의 왼쪽에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빗소리만 남았다. 가로등 불빛이 아스팔트 위에서 흔들렸다.
어딘가에서 나영의 이름이 울렸다.
아니, 울리지 않았다.
그냥 떠올랐다. 가슴 어딘가에서, 폐도 심장도 이미 멈춘 자리에서. 딸의 이름이.
그리고 어둠이 왔다.
완전한 어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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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 냄새였다.
탄 목재의 냄새, 오래된 기름이 그슬린 냄새, 시간이 굳어 딱딱해진 재의 냄새가 한꺼번에 코를 찔렀다.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그 복합적인 자극에 이끌려 눈꺼풀이 밀려 올라갔다.
검게 그을린 콘크리트 천장이 보였다.
곳곳에 뚫린 구멍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잿빛이었다. 새벽인지 저녁인지 알 수 없는, 빛도 어둠도 아닌 중간의 색이었다.
김명령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팔꿈치 아래로 모래와 자갈이 손바닥을 긁었다. 통증이 있었다.
주변이 폐공장이었다.
탄 냄새가 났다.
그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몇 초간. 그리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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