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티노 칸타레》 3화. 지리산 산신령의 무료한 하루
지리산은 봄이었다.
진달래가 먼저 알았다. 능선 따라 붉게 번지기 시작한 꽃빛이 남쪽 사면에서 북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기어오르고 있었다. 며칠 전 비가 씻어 놓은 공기는 차갑고 맑아서 먼 봉우리까지 윤곽이 선명했다. 참나무 가지에는 아직 여린 잎이 돋아나지 않았지만, 땅에서는 이미 냉이와 쑥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이 산에서 봄이 오는 순서는 언제나 같았다. 땅이 먼저, 나무가 다음, 능선이 마지막이었다.
수천 년이 그랬다.
산신령은 연못 가장자리 편평한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반듯하게 다듬어진 것처럼 생긴 자리였는데, 사실 그가 앉아서 엉덩이로 갈아 낸 것이었다. 수백 년 전부터 그 자리에서 물을 바라보았으니, 바위가 먼저 형태를 맞춰준 것인지, 그가 바위를 깎아 낸 것인지는 이제 알 수 없었다. 그도 기억하지 못했다.
연못은 고요했다.
해가 중천을 향해 오르면서 수면에 빛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초봄의 햇살은 아직 얇아서 온기보다 투명함이 더 많았다. 물 위로 빛조각들이 흩어졌다가 모였다가 했다. 산신령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 시선이 수면을 꿰뚫고 훨씬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아주 오래된 습관처럼.
무료했다.
이 감각도 익숙했다. 처음에는 낯설었다. 이 산에 좌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무료함이라는 것이 갑자기 어깨를 짓눌렀을 때는 당황스러웠다. 신이라는 존재가 무료함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수천 년이 흐르자 무료함은 그냥 공기가 되었다. 숨쉬듯 느끼고, 숨쉬듯 흘려보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이 오늘과 같았다.
연못 저편에서 물오리 두 마리가 수면을 가르며 헤엄쳤다. 오리들도 봄을 알았는지 지난겨울보다 수다스러웠다.
산신령은 손을 들어 물 위에 손가락 끝을 살짝 대었다. 차가운 수면이 손가락 지문을 그대로 읽어냈다. 물결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고, 오리들이 작게 몸을 흔들었다가 다시 헤엄쳤다. 그것이 전부였다.
"심심하다."
혼잣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자기도 모르게. 수천 년을 같은 말로 같은 봄을 맞이해온 셈이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가볍고 빠른 발소리였다. 땅을 박차는 느낌이 있었다. 두 발이 교차하는 간격이 짧고, 밟는 힘이 고르지 않았다. 달리고 있었다. 오솔길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인데, 방향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길을 잃었거나, 누군가가 앞에서 막고 있거나.
그러나 그것도 금방 잦아들었다.
남쪽 능선 너머에서였는지, 아니면 더 아래 골짜기 어딘가에서였는지, 어쨌든 소리는 곧 멎었다. 산신령은 몸을 돌리지 않았다. 이 산에서는 종종 그런 소리가 들렸다. 등산객들이 길을 잃거나, 노루가 놀라 달아나거나, 가끔은 밀렵꾼들이 덫을 놓으러 왔다.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또 사람이냐."
대꾸가 없었다. 주변이 조용했다. 곧 바람이 불어와 연못 수면을 살짝 흔들어 놓고 지나갔다. 산신령은 다시 물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연못 왼편 덤불 사이에서였다. 토끼였다. 흰 배가 보이는 갈색 토끼 한 마리가 덤불을 헤치고 연못가로 나왔다. 주둥이를 실룩이며 주변 냄새를 맡더니, 연못 가장자리에서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자그맣고 바쁜 소리였다. 조금 마시고,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고, 다시 조금 마시고.
산신령이 그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 또 왔느냐."
토끼가 주둥이를 멈췄다. 그 자리에서 귀를 세웠다.
"지난번에 서쪽 산 이야기 하러 왔던 그 토끼 아니냐. 얼굴이 기억난다."
토끼가 발을 움직이더니 옆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뭘 그리 무서워하느냐. 잡아먹지 않는다. 잡아먹을 이유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다."
산신령이 천천히 바위에서 내려와 연못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의 덩치에 비해 움직임은 뜻밖으로 조심스러웠다. 토끼와 눈높이를 맞추려는 것처럼 허리를 낮게 구부렸다. 토끼는 여전히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달아나지는 않았다.
"물은 맛이 어떠냐."
토끼가 귀를 한번 파르르 흔들었다.
"맛있다는 뜻이냐. 그야 좋지. 내 연못이니까."
산신령이 자기도 손을 물에 담갔다가 뺐다. 손바닥에 묻은 물을 보다가, 별 의미 없이 흔들어 털었다.
"서쪽 산 늑대들은 요즘 좀 어떠냐. 잠잠하냐."
토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냥 토끼였다.
"그래, 말은 못하지."
산신령이 일어섰다. 토끼가 그제야 덤불 쪽으로 느릿느릿 움직이더니, 두어 번 풀쩍거리며 사라졌다. 연못가에 다시 조용함이 내려앉았다. 물오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바람도 멎었다.
정오가 되어가고 있었다.
햇살이 수면 정중앙에 모였다. 빛이 그 지점에서 하얗게 타올랐다. 산신령은 다시 바위에 돌아가 앉으려다가, 이유 없이 그냥 서서 연못을 바라보았다. 조금 더 서 있으면 뭔가 다를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이 가끔 있었다. 오늘이 그런 날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천 년 전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어떤 남자가 이 연못에 도끼를 떨어뜨렸다. 사람 하나가 쓸 수 있는 도구를 잃어버렸을 때 얼마나 막막해지는지를 산신령은 그때 처음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사람이 도구 하나 없어 저렇게 애를 쓰는구나 싶었고, 그것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장난을 조금 쳤다. 금도끼를 꺼내 들고 나가서 이것이 네 것이냐 물었다. 남자는 눈이 똥그래졌다.
그 후 시끌시끌해졌다.
며칠 동안 이 연못 주변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도끼를 일부러 빠트리는 사람, 소문만 듣고 구경 오는 사람,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 산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연못까지 흘러왔다. 산신령은 그 며칠 동안 혼자서 꽤 즐거웠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 일 이후로 수천 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연못 주변이 그렇게 시끌벅적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 산에 신이 있다는 것을 잊거나, 믿지 않거나, 아니면 믿어도 굳이 연못까지 오지 않았다. 계절이 오고 갔다. 나무가 자라고 쓰러지고 다시 자랐다. 산에 깔린 돌들도 조금씩 자리를 바꿨다. 모든 것이 흘렀고, 산신령만 흐르지 않았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래 있다는 것이 꼭 많은 것을 안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 수천 년을 같은 산에서 같은 계절을 반복해서 보았다고 해서, 봄이 어떤 것인지를 더 깊이 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처음 이 산에 왔을 때 느꼈던, 진달래 냄새가 코끝을 건드리는 그 생경함 같은 것을 이제는 느끼지 못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둔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별수가 없었다. 오래된 것은 오래된 것이었다.
다람쥐 한 마리가 근처 떡갈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발톱이 나무껍질을 긁는 소리가 났다. 다람쥐는 나무 밑동에서 잠깐 멈추더니 산신령을 올려다보았다. 동글동글한 눈이었다.
"뭘 보느냐."
다람쥐가 볼을 부풀렸다. 어디선가 도토리를 가져왔는지, 양쪽 볼이 비대칭으로 불룩했다.
"많이 먹어 뒀느냐. 아직 봄도 안 됐는데."
산신령이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 하나를 땅에 뻗었다. 다람쥐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두세 발짝쯤 왔다가 다시 멈춰서 눈을 껌뻑였다.
"먹을 거 없다. 괜히 기대하지 마라."
다람쥐가 꼬리를 한 번 흔들더니 도로 나무 위로 올라갔다. 산신령이 일어서며 손을 털었다.
"겨울에 그렇게 굴을 파고 들어가더니, 이제 다시 나와서 또 분주하게 사는구나. 어찌 그리 쉬지 않느냐."
대답이 없는 것에 이제 아무 섭섭함도 없었다. 동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이 산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규칙이 있었다.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만 허락되었고, 그 조건이란 것이 워낙 좁아서 지난 수천 년 동안 손에 꼽을 정도였다.
금도끼 일이 그중 하나였다.
그때 잠깐 밖으로 나가 사람 앞에 섰던 것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게 마지막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후로는 조건이 맞지 않았다. 연못에 물건을 떨어뜨린 사람도 없었고, 설령 있다 해도 때를 가려야 했다.
연못은 오늘도 깊었다.
수면 아래로 얼마나 깊은지는 산신령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처음부터 이 깊이였는지, 아니면 시간이 흐르면서 깊어졌는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물빛은 낮에 햇살을 받으면 초록빛을 띠었고, 그늘이 지면 짙은 남색이 되었다. 사람들이 물가에 오면 항상 물빛을 오래 바라보았다. 색이 아름다워서인지, 깊이를 가늠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물이라는 것 자체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인지.
산신령은 그 이유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냥 연못이 깊다고만 알았다.
바람이 먼저 이상했다.
정오 무렵의 바람은 대개 골짜기 아래에서 능선 쪽으로 올라오는데, 오늘은 그 흐름이 한 박자 틀어졌다. 방향이 아니라 무게가 달랐다. 봄 공기에 섞여서는 안 될 무언가가 실려 왔다. 산신령이 미간을 좁혔다.
코에 닿는 것이 있었다.
짐승의 냄새가 아니었다. 땀 냄새와 흙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발을 오래 혹사한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였다. 게다가, 그 아래에서 철과 화약이 뒤섞인 무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산신령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 순간이었다.
탕.
총소리는 단 한 발이었다. 거칠고 메마른 소리가 능선을 넘어 들어오며 연못 수면을 흔들었다. 물오리들이 한꺼번에 퍼드덕거리며 하늘로 올라갔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 몇 마리가 방향도 없이 흩어졌다. 산신령은 움직이지 않았다.
탕.
두 번째가 왔다. 좀 더 가까웠다. 여운이 첫 번째보다 길었다.
연못 수면이 진동을 기억하고 있었다. 빛이 부서지는 자리에 잔물결이 생겼다가 스러졌다. 산신령은 그 물결이 완전히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연못 쪽으로는 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남쪽 능선, 이 산의 가장 가파른 비탈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을 산신령은 느꼈다. 발자국의 진동도, 소리도 아니었다. 이 산의 흙이 기억하는 무게였다. 이 산에 산 지 수천 년이 되면 그런 것이 느껴졌다. 땅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무겁지 않은 발이었다.
여자였다.
그리고, 그 뒤에서 훨씬 무거운 발들이 여럿이었다.
산신령이 연못을 내려다보았다. 수면은 이제 다시 고요해져 있었다. 봄 햇살이 물 위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러나 이 산에는,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산신령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총소리 두 발이 산속 공기에 흡수되었다. 산은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이 다시 조용해졌다. 떡갈나무 위의 다람쥐도 어느 틈에 사라지고 없었다. 연못에 돌아온 물오리 한 마리가 무감각하게 물장구를 쳤다.
산신령이 천천히 남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봄 능선이 어기적 없이 펼쳐져 있었다. 진달래가 붉고, 하늘이 맑고, 공기가 차고 깨끗했다. 아름다운 날이었다.
그 아름다운 능선 너머에서, 뭔가가 오고 있었다.
---
연못가 바위 위에 다시 앉은 산신령은 무릎 위에 두 손을 포개었다. 방금 전까지 다람쥐와 이야기를 나누던 자세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시선이 더 이상 수면을 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남쪽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이 수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산에 사냥꾼이 들어오거나, 군인들이 길을 잃거나, 등산객이 구조를 기다리거나 하는 일은 드물게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이 연못까지 닿지 않았다. 이 산의 깊은 쪽, 연못이 있는 곳까지 사람이 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지금 오고 있는 발자국의 방향은 정확히 이쪽이었다.
산신령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연못 수면에 대었다. 차가운 촉감이 지문 위에 올라앉았다. 잔물결이 퍼졌다.
총소리가 한 번 더 들릴 것인지, 아닌지.
그것을 기다리는 것인지, 아니면 기다리는 척하는 것인지, 산신령 자신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봄 바람이 연못 위로 지나갔다. 수면이 흔들렸다가 다시 고요해졌다. 산신령은 손을 물에서 뗐다. 손바닥에 묻은 물이 천천히 증발했다.
---
오후의 해가 조금 더 기울었을 무렵, 숲 안쪽 어딘가에서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가 났다. 한 번, 두 번. 발자국이 아니라 넘어지는 소리처럼도 들렸다. 그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산신령의 귀가 그쪽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울창한 봄 숲이 있었고, 그 안에 어두운 그늘이 있었고,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 그늘 어딘가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산신령이 바위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오래된 습관이 발동했다. 이 산의 것들이 위험에 처할 때, 그는 알았다. 알고 나서 무엇을 할지는 규칙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결정해야 했다. 그 범위란 것이 워낙 좁아서, 대부분은 그냥 바라보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오늘은,
탕.
세 번째 총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훨씬 가까웠다. 연못 수면이 다시 진동했다. 물오리가 날아올랐다. 숲속에서 짐승들이 달아나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새들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가 흩어졌다.
산신령이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남쪽 숲이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조금 작고, 빠른, 맨발이 흙을 짓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그 소리는 연못을 향해 오고 있었다.
산신령은 두 손을 옆에 내려뜨렸다.
수천 년 만에 연못이 시끌벅적해지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이 반가운 것인지, 그냥 봄날의 착각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댓글
댓글 쓰기